신문을 읽다가 신조어(新造語)를 만났다. 외노. 외국인노동자의 준말이라고 했다. 날카로운 어감이 단박 가슴에 와 꽂힌다.

한자로 쓰면 분명 外勞일 터인데 자꾸 外奴로 새겨진다. 외국인노예. 섬뜩한 표현이다. 정부가 손놓고 있는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부러 쓰는 말이라고 했다.

그들이 외국인노동자를 외국인노예라고 인식할 리 없다. 그들은 외노라는 줄임말의 차가운 울림과 거부감을 통해 우리 사회의 병든 의식과 잠든 양심을 흔들어 깨우고 싶은 게 아닐까.

 노예는 고대사회의 생산력 그 자체다.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양반)은 '인간기계들'이 생산한 잉여를 거리낌없이 누렸다. 노예는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자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이 땅에는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라는 게 있었다. 주인에게 매여 무제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던 노비를 솔거노비, 주인과 따로 살지만 일정한 노역을 바쳐야 하는 노비를 외거노비라 했다.

외거노비는 가정을 꾸밀 수도, 어느 정도 개인재산을 모을 수도 있었다. 기사는 어쩌면 외거노비만도 못한 외노들의 실태를 들려준다.

 그들은 한국여인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어도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한다.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생아가 안산에만 2백60명이 넘는다고 한다.

외노의 산재사고가 공식적으로만 하루에 2건 꼴로 발생하고 있다. 추방당할까 봐 신고하지 못하는 사고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슬람교도인 동남아시아 외노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예배의식조차 마음놓고 드리지 못한다. 속좁은 한국인들이 눈을 희번득이는 탓이다.

 길에서 마주치는 외국인노동자의 눈빛은 움츠러들었거나 까닭모를 증오마저 담고 있기 일쑤다. '코리안드림'은 진작 깨졌다.

우리는 외노라는 어감 나쁜 준말을 지금보다 더 자주 써야 하지 않을까. 엄연히 우리 사회 생산력의 한 부분인 그들에게 최소한의 노동권과 인권이 인정될 때까지. '인간에 대한 예의'에 예외란 있을 수 없다.

楊 勳 道 <제2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