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소로운 기대인지도 모르겠다. 눈이 내리면 성가시고 귀찮아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가난한 이웃들에게는 낭만적 감상이고 사치일 수도 있다.

지난 여름 수해로 모든 것을 잃었거나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배회하는 실직자, 노숙자들에게는 힘겨운 겨울나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에 불과할 것이다.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에서 눈은 그저 현실의 한 부분이 돼버렸다.

그러나 가슴 한자락에 눈에 대한 추억 하나쯤 간직하지 않은 한국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막상 함박눈이 소담스레 쏟아질라치면 도로사정, 생계걱정은 나중이고 우선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이 우리네 심성이다.

특히 올해 내리는 눈은 19로 시작하는 서력기원을 마무리한다고 하늘이 알리는 통고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문득 시 한편이 생각난다.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 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황지우, 소나무에 대한 예배)

소나무에 내린 눈이 시인에게 용서의 마음을 불러 일으킨 듯하다. 하지만 굽은 소나무처럼 휘어지며 살아가는 서민들도 눈이 내리면 용서라는 피해자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

오늘도 지상(紙上)엔 용서하기 힘든 일들이 넘친다. 고엽제, 옷로비, 고문기술자, 거액 퇴직위로금, 언론문건, 패륜아….

엊그제 영동지방에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뜨거웠던 여름과 허전했던 가을을 닫는 첫 눈이 곧 여기도 찾아올 것이다.

눈이 내린다고 우리 삶에 상처를 낸 이들을 쉽게 용서하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사기다. 눈이 온들 어디까지 용서할 수 있을까.

과연 용서할 수 있을까. 그래도 계절의 쉼표처럼, 천년의 마침표처럼 함박눈이 한바탕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