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실학파들은 초가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초가지붕은 불이 날 염려가 크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초가는 20세기 중반 이후까지 서민들이 선호하는 주거 공간이었다. 서민들은 가난해서 기와집을 갖지 못한 까닭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볏짚이 우수해서 초가지붕이 사랑을 받았다.

초가는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며, 장마에도 습하지 않은 장점이 있다.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은 무차별하게 초가지붕을 모두 없앴다.

이제는 민속촌에나 가야 초가를 볼 수 있는 게 안타깝다. 볏짚의 쓰임새는 너무 많았다. 대표적인 농기구로 '망태기'를 꼽을 수 있다.

가는 새끼를 그물처럼 성글게 엮어 끈을 달은 것으로 지금의 핸드백, 또는 숄더백과 같은 것이다.

몸에 걸치는 것으로는 우장과 짚신이 있다. 우장의 종류는 '도롱이'와 '접사리'가 있으며, 이것들은 비가 내릴 때 사용하는 것이다.

'도롱이'는 어깨에 둘렀고, '접사리'는 머리부터 뒤집어 썼다. 짚신에는 '막신'과 '미투리'라는 게 있다. '막신'은 대개 네 날, '미투리'는 여섯 날로 삼았다.

옛날엔 산모가 출산 기미를 보이면 산모방에 짚북데기를 깔았다. 이른바 '삼신짚'이다. 짚에는 분만과 아이의 성장을 돕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대문에는 새끼 금줄을 쳤다. 새끼줄이 액운을 막아준다고 믿은 것이다. 서민들이 죽었을 때엔 멍석 등 짚제품과 풀제품을 덮어 장사를 치렀다.

그 무덤을 초분(草墳)이라고 한다. 짚 위에서 탄생한 삶은 죽어서도 짚과 함께 묻혔다.

〈껍데기는 가라〉의 저항 시인(詩人) 신동엽의 미망인인 인병선씨는 지난 93년 서울 청담동에 '짚·풀생활사 박물관'을 세우고 민구 2천여 점과 2만 5천여 점의 사진자료를 갖추어 놓았다.

'멱서리' '멱등구미' '종다래끼' '씨오쟁이' '망태' '삼태기' 등 우리가 잃어버린 이름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게 했다.

며칠 전 국립민속관은 어린이들에게 초가에 이엉을 씌우는 걸 관람할 수 있도록 했었다. 그런 행사는 자주 가져서 나쁠 게 없을 것이다.

辛 世 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