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신문고(申聞鼓)'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지난 3일 신년사에서 “부정 부패를 뿌리뽑기 위해 청와대에 인터넷 신문고를 설치하겠다”고 천명했다.

탐관오리는 악하고 무능한 관리다. 이 나라엔 그런 공직자가 많아 국기가 흔들리고 있다. 그러기에 `2000년판 신문고'가 등장한 것같다.

 우리나라에 신문고가 처음 설치된 것은 조선조 태종 1년 7월이다. 중국 것을 본뜬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있었고, 거기엔 영사(令史)와 나장(螺匠)이 지켰다.

그때엔 그것을 `등문고(登聞鼓)'라 했었다. 그러던 게 후에 `신문고'로 개칭되었다. 신문고는 누구나 마음대로 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민원인의 입을 통해 그릇된 제도나 관리들의 수탈행위가 드러나는 터에 당사자인 관리들이 환영할 리 없었다.

신문고를 치려면 담당 관원·지방 수령·관찰사·사헌부·의정부 등의 확인이 있어야 했다. `확인'은 `불가(不可)'의 장치였다.

세종 때의 일이다. 노비 자재(自在)라는 여인은 신문고를 치려다가 거절당하자 광화문의 종을 마구 두드렸다.

그 뒤의 일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노비 신분에 법을 어긴 걸 감안하면 짐작이 가기도 한다. 조선조에 걸쳐 신문고의 존재는 `그림의 떡'이었다.

신문고가 유명무실해지자 16세기엔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을 허락했다. 상언은 왕의 행차가 있을 때 글을 올려 호소하는 것이고, 격쟁은 왕이 있는 근처에서 시끄럽게 징을 울려 소란을 피운 다음 억울함을 고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성들이 글을 몰라 `상언'은 실효가 없고, `격쟁'은 먼저 형조의 혹독한 취조부터 감수해야 되므로 외면했다.

 문민정부 때에도 대통령 집무실에 `컴퓨터 통신'을 열어 놓고 민원을 접수했었다. 하지만 크게 실효를 거뒀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홍보용'이었던 까닭이다. `인터넷 신문고'는 `진정한 신문고'가 되어야 한다. `익명 고발'까지 관심을 쏟아 언로를 활짝 열어야 할 것이다.

소문에 근거한 것도 조사해서 탄핵하는 이른바 `풍문거핵(風聞擧劾)'도 유효했으면 좋을 성싶다.

辛 世 默〈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