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문종 33년에 고급술인 행인자법주(杏仁煮法酒) 10병이 송나라에서 들어왔다. 술병은 붉은 색 바탕에 도금과 꽃이 조각된 상자에 들어 있었다.

그 술은 왕실에서 약으로 쓰였겠지만 당대엔 가장 비싼 수입주였을 것이다. 어느 국회의원과 재벌이 `루이 14세'와 `발렌타인 30년산' 양주를 들여와서 서민들에게 눈총을 받은 적이 있다.

값이 비싸 서민들은 구경조차 못한 술인 때문이었다. 이같이 예나 지금이나 술에도 빈부의 차가 심했다.

올해부터는 35%하던 소주의 주세가 72%로 껑충 뛰어 360㎖짜리 소주 한 병의 소비자 가격이 8백50원이 되었다. IMF의 고통을 달래는 서민들에겐 소주값이 부담이 아닐 수없다.

소주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안동에 병참기지를 만들면서 전파한 것이다. 그것이 서민층과 절친해지면서 고려 후기엔 전래의 막걸리·청주와 함께 `빅3'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우왕 원년엔 `소주 금주령'이 내려졌었다. 소주가 급속도로 유행을 타는 까닭이었다. 이듬해엔 `소주도(燒酒徒)'라는 불명예의 이름을 얻었다.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시던 경상도 원수 김진(金縝)이 왜구가 합포 군영을 공격하자 줄행랑을 친 뒤에 생긴 이름이다.

그때문에 조선조는 아예 소주를 약으로 쓰는 것 외에 마시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했었다. 고려 때 가전체 소설〈국순전〉은 임춘(林椿)이,〈국선생전〉은 이규보(李奎報)가 술을 모델로 쓴 것이다.

〈국순전〉은 무인 정치 밑에서 관료들의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의 내용이다.〈국선생전〉은 신하는 군왕을 도와 국치의 이상을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 상반된 삶을 살아간 작가들의 행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술은 그렇게 갖가지 사연을 안고 있다. 연인이 마주앉아 부딪는 술잔의 경쾌한 소리는 하늘이 준 복보(福報)일 것이며 `술이 사람을 먹는다'는 지경의 술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소주 한 잔에 싣는 서민들의 애환은 어려운 때일수록 애틋하고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辛 世 默〈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