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항일운동사를 취재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갔을 때 일이다. 성재 이동휘(誠齋 李東輝) 선생의 묘소를 찾아보고 싶다고 했더니 안내를 맡은 한인 3세 송지나교수(극동대학 한국학부)의 얼굴이 굳어졌다.

시내 북쪽 옛 공동묘지가 가까워져서야 송교수가 못마땅해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주택난 때문에 공동묘지 자리에 아파트단지를 조성했으나 예산부족으로 도로포장을 하지 못한 탓에 자길길도 그런 자갈길이 없었다.

중고자동차 바닥을 다 긁히면서 끄트머리에 조금 남은 옛날 묘지 자리에 겨우 도착했다. 그러나 표지가 될만한 것들은 다 훼손된지 오래라 선생의 묘소를 가려낼 재간이 없었다.

 성재의 묘를 가보고 싶었던 것은 우선 그가 강화도 신교육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구한국군의 군인이었던 성재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 교육사업에 힘을 쏟았다.

꺼져가는 나라의 운명을 살리는 길은 교육밖에 없다고 믿은 성재는 미국인선교사 벙커(한국명 방거) 등을 움직여 강화도 최초의 신식학교인 합일(合一)학교를 세웠다.

그는 전국을 돌며 학교를 세우기 위한 모금강연을 다녔는데, 어찌나 명연설이었던지 `한 번 연설에 학교 하나'가 생겨날 정도였다.

오늘날 강화지역의 초등학교는 모두 성재의 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해주로 망명한 뒤엔 한인사회의 지도자로서 독립투쟁을 이끌던 성재는 3·1운동 이후 탄생한 통합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추대된다.

그러나 이른바 `레닌자금'을 둘러싼 잡음으로 인해 총리직을 물러난 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고의적으로 그를 잊었다.

그는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인사회당의 당수였고,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대표였기 때문이다.

한국정부는 지난 95년에야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택했던 독립투사에게 뒤늦게 훈장을 추서했다.

 오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80주년. 그러나 아직 자신의 묘소조차 확인하지 못한 후손들을 보고 성재는 무어라고 할까.

楊 勳 道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