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횡단보도를 건너본 사람은 안다. `진행' 신호를 받은 자동차들이 얼마나 급하게 `쏘기' 시작하는 지. 우리나라 신호등은 보행자용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교통흐름을 위해 존재한다. 비장애인은 종종걸음으로라도 건널 수 있다. 하지만 장애인은 발을 들여놓자마자 신호가 깜박인다.

비명횡사를 면하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처음엔 `선진 교통문화가 정착되지 않아서려니' 했다. 그러나 매일 겪다 보니 `그것만은 아닐 지 모른다'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속도는 현대문명의 속성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성질이자 목표일 수도 있다. `느린 것'은 `참을 수 없는 대상'이 된다.

불가피하게 `흐름'을 끊어야 할 때도 최소화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어떻게든 빨리 목적지에 닿는 것이 자랑이라고 믿는다.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는 자는 낙오한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물려서 팽팽 돌아가는 사회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극단에서 `폭주족'같은 `일탈자'가 생겨난다. 그러나 `쏘는' 자동차를 욕하고 돌아서서, 화면이 팍팍 뜨지 않는 컴퓨터를 탓하는 자신에게서 현대인의 뿌리 깊은 `속도중독증'을 실감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우리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걸까. 풍요가 넘치는 사회? 그래서 더이상 속도를 낼 필요가 없는 세상? 그러나 생태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을까.

“전체 인류가 오늘날 한국 중류층만한 생활을 누리려면 약 30개의 지구가 필요하다.” 모든 인간의 `무한욕망'을 채워주기엔 이 행성의 자원이 너무 모자란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빠르게, 더 빠르게만 살아야 하는가.

 사회주의 체제가 몰락한 이후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빠름'의 논리를 대체(혹은 보완)할 `느림'의 철학이 절실하다는 사실이다. 이제 막 시작된 2000년대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楊 勳 道 <문화체육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