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6년 수원성역(城役)을 마친 정조대왕은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를 시켜 새도시 수원 일대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그려 남기게 했다. 그림은 모두 열 여섯 점으로, 봄경치 여덟과 가을경치 여덟로 나뉜다. 이 수원춘팔경과 추팔경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원팔경이라는 단일 카테고리로 정리됐다. 그 시기는 아마도 성역이 끝나고 한세대쯤 지난 18세기 중엽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러나 200년이 지난 오늘날 수원팔경은 거의 대부분 원형을 잃었거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유일하게 옛모습을 잃지 않은 곳이 있다면 바로 `흰 눈 덮인 광교산(光敎積雪)'이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보호하듯 북풍으로부터 수원을 감싸안고 지켜주는 광교산이 물론 겨울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수원시민들은 광교산의 변화에서 계절을 읽는다. 사시사철 주말이면 마치 줄을 서듯 시민이 몰려 산에 오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수원시민들은 아마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본 서기(瑞氣)를 다시 느끼기 위해서 광교산을 찾는 듯하다.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을 물리치고 개성으로 돌아가던 길에 이 산에서 뿜어지는 빛줄기를 보았다. 산의 정기가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챈 왕건은 명산광교(名山光敎)라는 산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표고 580m 남짓 높지 않은 산이지만 광교산에 오르는 시민들은 거기서 마음의 때를 벗고 새로운 1주일을 살아갈 새기운을 흠뻑 받아 내려오는 게 소원일 터이다. 어느 시인이 표현했듯 광교는 수원의 민초들에게 `어머니 가슴 같은 산'(용환진, 겨울꽃-만석전)이다.
 그런 광교산이 파헤쳐지고 있다 한다. 난개발의 광풍 속에 경치좋은 곳을 선점하고파 안달이 난 졸부들이 산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행정당국의 답변을 들어봐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개인 소유의 땅에 적법한 절차를 거쳤다면 허가를 내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광교산 청풍과 명월의 주인은 정녕 누구인가? 아무리 못난 후손들이기로서니 마지막 남은 수원팔경마저 사라지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楊勳道(논설위원)>
 (양 훈 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