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봉기했고 후일 무장독립투쟁으로 계승된 항일의병 투쟁은 흔히 시간적 흐름에 따라 전기(1894~1896), 중기(1904~1906), 후기(1907년이후)로 나뉜다.
그러나 의병세력이 지향했던 목표인 국권회복이라는 큰 틀속에서 「왕정으로의 복귀냐(복벽주의)」아니면 「새로운 민국건설이냐」로 분류할 수도 있다.

조선왕조 복귀를 꿈꾸며 펼쳐졌던 의병활동사에서 복벽주의는 전기부터 후기까지 끊임없이 전개됐지만 1919년 3·1운동과 4월 임시정부 수립을 거치면서 수그러들고 만다.

복벽주의를 주창했던 대부분의 의병투쟁과 고종황제가 밀파한 헤이 그밀사사건 등 왕정복고형 독립운동들이 번번이 실패호 돌아갔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가장 왕성한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유인석(柳麟錫)선생과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초기 왕정복고를 꾀하는 복벽주의 입장에서 임시정부와 무력충돌까지 불사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또 공주군수를 지내다 만주로 망명, 항일투쟁 최선봉에 섰던 양기하(梁基瑕)선생도 초기 복벽주의 입장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 사령관 등을 역임하면서 「민국건설」로 방향을 선회했다.

「나는 다리」 이진용 열사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 역시 다른 의병장들과 마찬가지로 복벽주의자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될 따름이다.

현재 「복벽주의」항일운동에 대한 역사적 시각은 미완이다.

지난해 11월 국빈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한 金大中대통령이 『임정(臨政)이 왕정복고운동을 하지 않고 민국(民國)을 세운 것은 바른 판단이었다.』는 말에서 단초를 찾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