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비석은 만주땅 이름없는 야트막한 산자락 한켠에 있었다.

「남편은 나라를 위해 죽었고(夫爲國死)…부인은 남편을 따라 순절하였으니(婦爲夫死)…」.

비문은 80여년의 풍상에 파이고 지워져 쉬운 한자조차 해독하기 어렵다.

하루에 5백리를 걸을 정도로 걸음이 빨랐기에 「나는 다리」로 불리던 걸출한 항일의병장 이진용(李鎭龍)열사와 남편의 순국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인 우(禹)씨.

그들은 머나먼 중국땅 차가운 바람이 옷섶을 헤치는 만주벌판 한 가운데 그렇게 두 개의 비석으로 남아있었다.

비석 주위엔 잡초들만 무성하고 아래로는 환인저수지의 물결만이 바람따라 출렁인다.

지난 92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는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강용권(姜龍權·55)교수의 안내가 없었더라면 취재진은 분명 이들 비석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관전현 청산구향(寬甸縣 靑山口鄕)에서 은광자촌(銀廣子村) 방향으로 다섯번째 마을 초입의 왼쪽 산비탈, 눈여겨 봐둔다 해도 다시 찾기 어려울 위치에 비석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열사의 비는 높이 96㎝, 밑면 너비 37㎝, 윗면 너비 17㎝, 두께 9㎝의 화강암으로 중간 윗부분에 세로로 의열비라고 씌어 있고 아랫부분에 비문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의열비 옆에는 당시 의병장으로 황해도에서 이름을 떨치던 우병렬(禹炳烈)열사의 딸이자 이열사의 부인인 우씨의 열녀비가 비슷한 크기로 나란히 자리잡았다.

취재진이 이진용열사에게 관심을 갖고 어렵사리 비석까지 찾아간 것은 이곳 관전현에서 그는 아직도 「살아있는 신화」로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대구촌(自袋溝村·일명 자루골)에서 3대째 살고 있는 王肅晶(72)씨는

『선친과 마을 어른들로부터 이진용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특히 독립운동을 위해 조선진공작전을 무수히 전개하면서도 주민들의 애경사(哀慶事)에 빠지는 법이 없어 칭송이 자자했다』고 전했다.

호가 기천(己千)인 이진용열사는 1879년 황해도 평산군 주암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구한말의 유명한 의병장인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이자 역시 의병장인 사산(史山) 우병렬의 딸에게 장가들어 그의 사위가 된 이열사는 26세인 1905년 조맹선(趙孟善), 신준빈(申俊彬), 신정희(申貞熙), 한정만(韓貞滿 또는 韓貞萬) 등과 함께 황해도 평산에서 첫 의병을 일으켰다.

이열사는 한정만 등과 합세해 의병 80여명을 이끌고 평북 경의선 계정(鷄井)역 서쪽 10리쯤에 위치한 당동(堂洞)에서 수색나온 온정원(溫井院)분견소 일본 헌병 7명과 교전한 뒤 곧바로 장성과 계정을 잇는 기차선로에 길이 1척9촌(1척은 33㎝), 너비 1척2촌 크기의 돌덩이를 놓아 기차를 전복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또 한정만, 공태원(孔泰元), 연기우(延基羽) 등과 함께 부하 40~50명을 거느리고 경기도 장단, 황해도 연안, 백천, 재녕, 수안 등을 무수히 넘나들며 일경들을 혼줄 내주곤 했다.

경기도·황해도를 거점삼아 일제와 싸우던 이열사는 1910년 경술국치후 국내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이듬해 10월 부대지휘권을 한정만에게 넘긴뒤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관전현 청산구향 은광자촌으로 이주, 이곳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한다.

이열사가 관전현을 새독립기지로 삼은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이곳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조선이 서로 마주보는 국경에 위치하고 있는데다 일제의 박해를 피해 이주한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많아 당시 독립기지로는 적격이었다.

이곳은 실제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동북각지로 퍼져나가는 독립군의 관문역할을 담당했다.

독립기지가 건설됐던 청산구는 남만주일대를 남북으로 흐르는 혼강(渾江)지류가 자리해 당시에는 야하구(揶河口)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관전현 민족사무위원회가 1860년대 중반 발간한 「관전현의 만족과 조선족」에 의하면 이곳에는 1861년 이미 조선족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자료는 「고려구」, 「고려묘자」, 「고려방구」라는 지명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조선사람들의 거주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강점한 1910년 경술국치를 기점으로 이주민수가 급격히 늘었다.

1909년 관전현에는 5백88호 2천3백31명이 살았으나 1915년에는 2천40호에 1만1천3백7명으로 거주민수가 4배 가까이 늘었다.

또 1911년 10월 이열사가 이주했던 관전현 야하구지방은 총 4백80호의 이주민들이 크고 작은 46개의 부락을 형성, 중국인보다 그 숫자가 훨씬 많았다.

이곳에 터를 잡은 그는 우병렬, 조맹선, 우성백(禹成栢) 등과 함께 독립군들을 규합, 세를 키워나갔다.

하지만 이열사는 이곳에서 여느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른 독특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