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용정(龍井)의 오후는 엄숙하다. 수많은 독립투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거리 곳곳에서 독립의 결연한 의지와 피끓는 함성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곳으로 이주, 종교단체로 위장한 학교에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가며 한민족의 뿌리와 역사적 소명의식을 배우고 무장항쟁의 결의를 다졌을 당시의 긴박감과 결연함마저 느껴진다.
용정의 오후는 「구한말 영화촬영을 위한 세트장」을 연상케하며 당시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瑞甸大野遺跡地(서전대야유적지)」라고 쓰여진 기념비만이 외롭게 서있는 3.13만세운동의 집회장소에는 현대식건물의 용정시 제일유치원이 들어서있고 거사(擧事)의 신호탄이었을 성당의 종루도 온데간데 없이 시멘트건물로 바뀌었지만 일과가 끝나면서 인적이 드물어진 「현장」은 성난노도와 같은 인파의 물결과 고결한 생명을 바쳐가며 외쳤던 영령들의 기개에 찬 함성을 다시 토해내고 있었다.
80년전 그날, 이국땅 용정에서도 기미년 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울려펴졌다.
1919년 3월13일 길림성(吉林省) 용정의 서전(瑞甸)벌판에 조선인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국자가(局子街.지금의 延吉), 개산툰(開山屯), 화룡(和龍)등지에서 밤새워 이곳에 모여든 조선인들은 무려 3만여명.
모두가 목숨을 건 비장한 표정들이다.
김약연(金躍淵)목사등 17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정오 성당의 종소리를 시작으로 김영학(金永學)의 독립선언포고문이 낭독됐다.
「아(我) 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人道)를 선언하도라.」
수많은 군중들의 만세소리와 함께 일본총영사관을 향한 시가행진이 시작됐다.
명동학교 교원과 학생으로 조직된 충렬대(忠烈隊)가 선두에 섰고 청년과 장년, 부녀자와 노인들이 그뒤를 따랐다.
3월10일까지 이같은 거사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가 일제의 강요에 못이긴 중국경찰대장 맹부덕(孟富德)부대는 당황한 나머지 시위대를 향해 일제히 총을 쏴댔다.
총탄도 성난 파도처럼 전진하는 이들의 행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10명의 고귀한 생명이 그자리에서 쓰러졌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시위대는 중상자 모두를 영국인이 경영하는 제창병원으로 옮겼다.
비록 죽더라도 조선에 총뿌리를 들이댄 일본인 병원에서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창병원은 1914년 캐나다 선교사 바커(A.H.Barker)부부가 용정촌 동산(東山)에 설립한 병원으로 독립운동가의 정치적 피난처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이 병원 지하실은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되기도 했다.
동산에 위치했다는 것만 추정될 뿐 지금은 가정집이 들어선 이곳에 부상자들의 신음과 가족들의 울부짖음, 이들을 바라보며 분기탱천하는 선열들의 피끓는 울분이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다.
이곳에서 4명이 치료를 받다가 당일 숨졌으며 시일이 좀더 지난후에 5명이 사망, 모두 19명이 아까운 생명을 바쳤다.
그러나 이들의 희생은 만주지역 조선인들의 울분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같은해 3월20일 훈춘(훈춘)의 만세사건을 비롯, 5월말까지 만주전역에서 50여회에 걸쳐 7만여명이 집회와 시가행진을 벌이는등 일제에 대한 항거가 잇따랐다.
3.13 만세운동을 시발점으로 이같은 만주전역에서의 평화적 시위는 이듬해 봉오동전투나 청산리대첩등을 비롯, 20년대 이후 계속됐던 만주지역 무장투쟁의 모태가 된다.
그해 3월17일 이들 순국의사들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무려 4천여명의 조문객이 모여들어 13일보다 더 긴장되고 격렬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14구의 상여를 메고 가는 행렬은 공동묘지가 있는 합성리촌(合成利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의 함성은 시내를 약간 벗어나 3.13묘지에 잠들어 있다.
용정시내에서 명동촌 방향으로 거슬러가다 용남촌(龍南村) 부근의 큰 길에서 미루나무가 늘어선 논둑길을 따라 가면 13기의 묘가 눈에 들어온다.
「3.13反日義士陵(반일의사릉)」이라는 묘비가 없다면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수십년의 세월과 우리 민족이 겪었던 고초만큼이나 묘지는 풍상에 깎여 보잘것 없이 초라하다.
원래는 당일 사망한 14명의 묘가 있었으나 1기는 가족들이 이장, 현재는 13기만이 그날의 함성을 묻은채 조용히 잠들어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열사들의 무덤은 확인되기 어려웠다.
무덤을 찾기 위해 용정시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최근갑(崔根甲)회장(74)을 중심으로 한 「3.13반일의사릉 수복위원회」가 설립됐다.
수복위는 89년 하반기에 다섯차례의 현지답사를 했고 32명의 유관인사도 방문했다.
그후 90년 4월
[만주항일투쟁 현장답사-8] 日帝항거 불붙인 『3.13 만세운동』
입력 1999-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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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2-1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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