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선생은 이준(李儁)·이위종(李瑋鐘)선생과 함께 헤이그 3밀사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준 열사는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파견돼 을사조약의 무효를 부르짖다 자결했다.

지난 95년 이열사가 숨을 거두었던 드용호텔 3층건물을 개조, 이준열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이역땅을 헤메던 고혼(孤魂)의 쉴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金大中대통령은 지난 1월 『平和(평화)』와 『敬天愛人(경천애인)』이라고 쓴 친필휘호를 기념관에 기증,영구전시되게 됐다.

당시 헤이그 국립공원에 시신을 묻고 묘비를 세우면서 이상설·이위종 두선생이 비문을 썼다.

헤이그의 각종 집회에서 청중들의 눈물을 쏟게 했던 명연설자 이위종선생은 주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의 아들로서 만국평화회의 이후 러시아인과 결혼한뒤 장인을 모시고 어렵게 살았다.

페테르브르크의 화물역에서 근무하다가 세계 1차대전이 일어나자 소위로 임관, 2년동안 복무하다가 소식이 끊겼다.

전쟁중 사망했다는 설과 혁명후 귀족출신이라는 이유로 처형됐을 것이라는 설이 있을 뿐 고혼은 얼어붙은 러시아 동토를 헤메고 있을 것이다.

1870년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난 부재(簿齋) 이상설선생은 1894년 조선의 마지막 과거에 급제해 요직을 거쳤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헤이그 밀사로 파견됐고 이후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1917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국 광복의 한을 품은채 작고했다.

이상설선생은『조국에 돌아갈 면목이 없으니 시신과 유품을 모두 태워 시베리아 벌판에 뿌리고 광복이 되기전에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광복후 고향 진척의 생가는 장마때 무너져 없어지고 장서는 고물상에게 넘어간것을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알고 회수해 국회도서관에 기증했다.

지난 71년 부재선생 사업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출생지인 진척 교성리 일대에 숭모비를 건립한데 이어 75년 부지를 확정, 숭렬사를 건립해 선생의 영정을 봉안해 왔으나 업적에 비해 규모나 시설이 크게 초라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추진위는 지나 94년부터『숭렬사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유물관과 기념관등을 설립, 선생의 애국정신을 알리는 교육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진정을 각계에 제출했으나 지지부진하다 96년 6월에 가서야 생가 성역화 사업이 승인됐고 97년 생가 옆부지에 사당과 동상이 건립됐다.

이제서야 고혼의 안식처가 마련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