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트막한 산 비탈에 두개의 비석이 조용히 한 마을을 주시하고 있다.

마치 캄캄한 바다위 길잃은 고깃배에게 생(生)의 희망뱃길을 인도해 주는 고독한 등대처럼.

그 비석이 응시하는 곳은 용이 누워있는 형태의 산이라는 뜻을 가진 와룡동(臥龍洞). 행정구역상 연길시 소영향 민주촌(延吉市 小榮鄕 民主村)이지만 민간인들은 지금도 와룡동이라고 부른다.

1920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일본돈 15만엔 탈취사건을 주도한 최봉설(崔鳳卨)의 생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을 입구 오른켠에 와룡촌이라고 새겨진 비석은 찾아오는 길손들의 기분을 비장하게 한다.

중국의 여느 농촌마을과 다를바없는 작고 초라한 마을, 그러나 개발의 붐을 타고 현대식 주택을 짓는 인부들의 몸놀림이 11월의 추위도 아랑곳없이 바쁘다. 마을끝 언덕너머로는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은사기념비(恩師記念碑)」라고 쓰여있는 한개의 비석에는 「오상근(吳祥根), 이병휘(李炳徽), 남성우(南性祐)」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창동(昌東)학교의 교사들이다.

1935년 아직도 서슬퍼런 일제의 총부리가 조선인들을 겨냥하고 있던 무렵에 이 학교출신 제자 2백여명이 스승들의 공로를 잊지못해 이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아래쪽에 창동학교의 건립과 운영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던 12명의 명단이 있다.

이 가운데 최종환(崔宗煥)은 「일본돈 15만엔 탈취사건」의 주모자인 최봉설의 할아버지뻘 되고 정지형(鄭之衡)은 창동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경신년 대학살때 살해된 정기선(鄭基善)의 아버지이며 나시영(羅時榮)은 연해주에서 임국정, 한상호, 윤준희등과 함께 체포됐던 나일의 아버지다.

지금 창동학교는 흔적도 없이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렸지만 비문에 새겨진 교사 명단의 무게만으로도 당시 창동의 민족정신과 강인한 항일(抗日)의지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이들 12명의 인사는 1907년 창동소학교를 세웠다.

동(東)이란 글자는 당시 중국에서 조선을 부를때 사용하던 말로 창동이란 이름은 조선의 창성함을 바라며 지은 것이다.

1912년 중학부를 증설하면서 학교이름을 창동학원으로 고쳤다.

학원의 중학생들은 80여명이었는데 연변 각지는 물론 남만(南滿)과 북만(北滿)을 비롯, 조선 러시아 연해주에서 천신만고를 겪으며 찾아온 학생들도 있었다.

학원의 정신은 자유, 이상은 독립이었기에 창동학원 학생들은 일제의 탄압속에서도 그들에 항거하며 항일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웠다.

용정 3·13시위가 벌어졌을때 이 학원 전체 사생들과 와룡동의 청장년들은 반일의 물결에 합류했다.

이 학교 출신들 상당수는 후에 왕청현(旺淸縣)을 비롯한 관내 사관학교에서 무술을 연마, 독립투쟁의 선봉이 됐다.

15만엔 사건의 최봉설과 임국정등 철혈광복단원 대부분이 이 창동학교 출신이다.

1920년대 들어 용정(龍井)의 동흥·대성학교를 주축으로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전파와 더불어 이곳에도 전에없던 혁명가곡, 항일가곡이 널리 퍼졌고 「빠리꼼뮨」 「20세기 매도론(罵到論)」과 「3천리」 「비판」등의 소책자가 학교와 마을의 곳곳에 유포되면서 사회주의의 거센물결이 일기도 했다.

1931년과 1932년에 창동학생들이 악덕지주를 내몰고 양식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는등 반봉건·반일 투쟁의 깃발을 올리자 와룡동은 일본군경들의 「눈엣가시」가 됐다.

1934년에 일제는 와룡동의 거센 항일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창동학원에 군경을 주둔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를 간파한 학생들과 와룡동 사람들은 그렇게도 사랑하고 정성들여 꾸려온 학교에 스스로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1920년 경신대학살때 일제에 의해 학교가 불탄후 두번째다.

『일제는 군경을 와룡동에 장기 주둔시키려는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변절자 이정희를 두목으로 장총 16자루를 보유한 무장자위단을 꾸렸습니다. 그러나 와룡동의 항일 군중들은 자위단 단원을 꼬여 16자루 장총을 모두 땅속에 묻어 버렸지요. 일본놈들은 주민들에게 모진 매를 가하며 내막을 파헤치려 했지만 결국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습니다.』 연변대 朴昌昱교수가 밝힌 와룡동 주민들의 가열찬 항일투쟁의 한 일화다.

朴교수는 『창동학교는 교기로부터 모표, 교가에 이르기까지 민족정신과 반일정서로 다져져 있었다』며 『교기는 백의겨레의 상징으로 흰 명주폭 바탕에 옻칠로 「사립창동학교」라고 썼고 깃대는 한마디 건너 옻칠을 하고 꼭대기에 은빛 원구를 꽂았다』고 말했다.

또 모표는 세개의 원을 삼각으로 연결해 아래 두원 안에는 「창동」이란 한자를, 위의 원안에는 백두산을 상징하는 원뿔모양(錐形)을 새겨 넣었는데 세개의 원은 삼천리 무궁화강산을 상징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