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훈춘지역의 3·1운동지도자 황병길(黃炳吉)선생은 일반인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그의 부인과 자녀 모두가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특히 그는 두만강건너 함경북도 경원군 신아산(新阿山)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습격했을 당시 14명을 사살하는등 큰 전과를 거두어 「훈춘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885년 4월15일 함북 경원군 양하면에서 출생한 황선생은 1904년 러일전쟁전 우리나라 간도관리사였던 이범윤(李範允)이 훈춘지역에서 조직한 사포대(射砲隊)에 참가했으며 안중근이 지휘하는 의병대에 속해 두만강건너 회령, 온성, 경원지방을 여러차례 공략했다.

1919년 3월20일 훈춘의 만세시위를 주도, 독립운동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과시했고 그해 9월에는 훈춘거주 여성들로 훈춘애국부인회를 조직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밖에도 조직들을 활용, 군자금 모금과 전상병자의 치료, 구제사업등을 펼쳤고 1920년에는 경흥(慶興)일대에서 왜정기관을 폭파하고 왜밀정을 사살하는등 총체적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일제에게는 「목의 가시」였던 그는 일군과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1920년 6월1일 35세의 나이에 급성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부인에게 『아들 정해(貞海)가 열다섯을 넘으면 이권총을 넘겨줘 왜놈과 싸우게 하라』는 유언과 함께.

훈춘시연통랍자(煙筒粒子)에 안장됐던 선생의 유해는 지난 97년 한국으로 봉환됐으며 그해 12월10일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

황선생의 부인 김수경은 1919년 9월 훈춘애국부인회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군을 위한 탄띠, 버선, 각반, 장갑등을 만들어 지원했고 그해 10월 일제의 경신대학살이 시작되면서 일제가 연통랍자 청년들을 모조리 죽이려 할때 『나에게 죄가 있으니 무고한 백성들을 모두 풀어주라』며 대신 붙잡혀 고문을 당하는등 독립운동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그녀 나이 41세되던 1927년 식중독으로 사망했다.

황선생의 맏딸 황정선(黃貞善)은 학생시절부터 용정에서 반일투쟁을 계속해왔고 훈춘애국부인회에서는 아동단 조직을 책임졌다.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남편 김규봉과 함께 항일투쟁을 벌였다.

둘째딸 황정신(黃貞信)은 어렸을 적에 가족들의 서한을 전하는 조수역할을 하다 193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3년 중국유격대 간호사역할을 했으며 34년 2월 유격대를 추격하는 일군에 포위당하자 벼랑에서 뛰어내려 24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셋째딸 황정일(黃貞一)은 북일학교 창시멤버였던 김남극손자의 부인으로 지난해 6월 사망했다.

외아들 황정해(黃貞海)는 중국공산주의 청년단과 항일연군에 가입해 일제와 맞서 여러차례 전투를 벌였고 1940년 전우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위해 사냥에 나섰다가 곰에게 희생돼 22살의 생명을 바쳤다.

황선생 일가는 이러한 연계와 독립운동의 대물림속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했고 끝내는 일제를 몰아내고 광복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