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을 찾아가는 길은 1920년 10월의 격전만큼이나 험난했다.

초겨울 간간히 흩뿌리는 빗줄기는 길바닥을 빙판으로 만들어 거북이 운행을 강요했고 만주 삭풍은 끊임없이 가슴속을 파고 들었다.

차량 고장으로 마음은 더욱 바빴지만 길목은 거대한 댐 수몰공사로 목적지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독립군 연합부대 2천여명의 대원들이 6일동안 한데서 잠 한숨 못잔채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이며 조국독립을 위해 싸운 청산리전역(靑山里戰域).

연길(延吉)에서 1백여리를 달려 화룡(和龍)에 닿은 취재진은 일군 1천3백여명(최고 3천3백명까지 추산)을 사살, 근대사 최대 승첩으로 기록된 청산리전역의 첫번째 전투지 청산리(靑山里)로 향했다.

청산리는 화룡소재지에서 서남쪽으로 해란강(海蘭江)과 그 옆의 자동차길 사이로 난 협도(狹道)를 따라 40여리를 달린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70년대 시골길을 연상하는 비포장도로 옆으로 20여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곳은 화룡시 청산촌(靑山村) 소재지이자 시정부 임업국 청산림장 사무실이 들어서면서 당시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15리가량 떨어진 곳에 청산리전역 최초의 격전지인 백운평(白雲坪)마을이 있다.

물안개와 흰구름 안개가 자주 발생해 백운평으로 불린 그 곳은 인근 산들이 모두 민족 영산(靈山)인 백두산의 남강산맥과 이어져 산세가 험한데다 골짜기의 남북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동서는 좁은 골짜기가 펼쳐져 천혜의 요새처럼 보였다.

이 곳에 백야(白冶)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이끄는 왕청현(旺靑縣) 서대파, 십리평 주둔 북로군정서군이 들어온 것은 10월 12일과 13일.

당시 일본은 홍범도(洪範圖)장군의 봉오동전투(1920년6월) 참패이후 북간도지역 독립군 말살정책 일환으로 그해 8월 독립군 토벌계획인 「간도지방 불령선인초토계획」을 마련, 인근 지역에 출동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특히 일본은 청산리전역 직전인 10월초 중국 마적단을 매수해 훈춘(琿春)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불을 지른 후 이것을 독립군 소행으로 뒤집어 씌워 토벌대 병력을 연길, 화룡 등지에 집중 투입했다.

일본은 이를 빌미삼아 독립군 탄압 집중공략 지역으로 청산리 초입에 위치한 화룡시 두도구(頭道溝)지역을 지목했다.

이는 1920년 8,9월부터 청산리지역에 주둔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 안무(安武)장군의 국민회군, 최진동(崔振東)장군의 군무독군부군과 신민단, 의군부, 광복단, 의민단 등 10여개의 독립군을 겨냥한 포석이었다.

일군은 우선 독립군을 일격에 말살시키기 위해 보병 1개대대를 동원해 청산리 인근 유곡령, 부동, 올지강 등 세곳을 지키게 하고 보병 1개연대와 기병, 포병 2개중대 등으로 인근 퇴각로를 완전히 봉쇄했다.

10월21일 새벽, 이들은 결국 사면(四面) 사백리를 갈고리 모양으로 둘러싼 채 아스카와(安川)소좌가 지휘하는 선발부대 90여명을 기습투입했다.

일군 선발대는 북로군정서군이 숙영했던 터와 60여개의 불무지를 확인하고 경계를 강화하면서 매복권쪽으로 이동했다.

맨 앞에 섰던 선발대 첨병이 독립군의 매복진지를 발견하고 신호하려는 순간 북로군정서군 연성대장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장군의 신호총소리와 함께 일제사격이 개시됐다.

결국 90여명의 일군 선발대는 이날 전투에서 모두 사살됐으며 이 소식을 접한 일군이 후발대를 동원, 정면과 측면에서 독립군을 공격했으나 반격에 밀려 많은 전사자만 낸채 퇴각하고 말았다.

전투에서 승리한 김좌진장군은 다음날 새벽 이도구(二道溝)지역 봉밀구로 이동했다. 이곳은 청산리전역중 대표적 전투로 불리운 천수동(泉水洞)전투, 어랑촌(漁浪村)전투, 완류구(完流溝)전투가 있었던 곳.

화룡에서 1백20리가량 떨어진 천수동에 도착한 북로군정서군 등 연합부대는 이 곳에 주둔중인 일군을 포위 기습공격하기로 결정했다.

독립군의 일사불란한 기습공격을 받은 일군은 혼비백산해 대오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도망치다 모두 사살됐으나 일부 일군들이 인근 어랑촌본부로 도망쳤다.

어랑촌에 도착한 패잔병을 통해 이 사실을 접한 일군 본부는 대책을 마련하는 한편 천수동에서 어랑촌으로 들어오는 정남(正南)방향 길목을 물샐틈없이 경계했다.

그러나 미리 주둔해 있던 홍범도장군의 대한독립군과 연합한 김좌진장군의 북로군정서군 등 연합부대는 22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무려 10시간동안 밀고 밀리는 전투를 전개했다.

몇차례의 진공작전에 실패한 일군은 일부 기병부대를 동원, 독립군 진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