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눈으로 뒤덮인 산 자락 한곳에 구덩이가 있다.
나무가 제법 가꾸어져 있고 큼지막한 돌들이 가지런히 놓여져 있어 무엇인가를 표지해 놓았던 무덤이었음을 한 눈에 알수 있다.
김좌진(金佐鎭)장군이 피살당한뒤 묻혔던 곳이다.
흑룡강성 동산시 신흥촌(黑龍江省 東山市 新興村).
동쪽과 서쪽을 잇는 산자락사이에 병풍처럼 자리한 이곳은 오직 남쪽만이 시원하게 트여있는 드문 명당자리란다.
김장군을 돕던 8명의 원로(八老)들과 지관등 10명이 해림(海林)일대와 산시일대 1백여리를 샅샅이 훑으며 물색한 결과 최후로 선정된 곳이다.
당초 넓은 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마루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생전에 만주의 넓은 광야에서 떨었으니 묘라도 따뜻한 곳에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산기슭 아늑한 곳에 묘를 정했다.
8로들은 장례를 치른후 24시간 교대로 한치의 틈도없이 돌아가면서 묘소를 지켰다.
그후 1934년 봄, 8로들의 지휘로 김장군의 유해를 반환하게 됐다.
김장군 고향인 충남 홍성에서 본부인 오숙근이 참여했고 8로를 중심으로 김장군의 옛전우와 부하들이 면례에 참가했다.
묘로부터 중동철도까지는 약 7백m, 전용짐차를 빌려 새로 입관한후 기차에 싣고 하얼빈, 심양, 단동을 지나 조선 신의주를 거쳐 한국으로 반환했다.
다만 일본군에게 파헤쳐질까 걱정돼 세우지도 못하고 묘소곁에 묻어야만 했던 목비(木碑)만은 유해와 함께 가져가지 않고 원래의 자리에 묻어두었다.
김장군의 묘터에서 산시진방향으로 도로를 달리면 철로변에 허술하게 자리잡은 산시역이 나타난다.
산시역에서 바로 남쪽으로 나와 동쪽길을 2백여m 따라가면 작은 마을이 나오고 다시 동쪽으로 40m가량 가면 김장군의 자택겸 정미소자리가 나온다.
행정구역상 해림시 산시진 도남촌(道南村) 문명로(文明路) 11의 1 김장군이 최후를 마친 곳이다.
장진립(張鎭立)이라는 51세의 중국인이 30여년동안을 살고 있다.
1930년 1월24일(음력 12월30일) 아침 이곳에서 불길한 징조가 잇따라 일어났다.
음력설이 닥쳤으나 정미소 기계가 고장나 쌀을 찧을 수가 없게 된 것.
한인(韓人)자치조직의 수장인 김장군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난밤 등불을 켜놓고 밤새도록 기계를 수리하다가 겨우 새벽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밥을 먹으려는 순간 이번에는 숟가락이 부러지고 말았다.
다른 숟가락으로 바꾸려는데 마침 정미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장군은 너무도 반가워 수저를 놓고 밖을 내다봤다.
대문에서 방앗간까지의 거리는 불과 열댓걸음, 방앗간 문을 열려는 순간 등뒤에서 한방의 총성이 울렸다.
김장군은 쓰러지지 않고 웬놈이냐고 소리치며 돌아서려는 순간 또 한방의 총소리가 났다.
7척 장군이 풀죽은 나무처럼 허무하게 쓰러졌다.
총소리에 놀란 별동대들이 튀어나와 범인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거의 따라잡을 무렵 범인이 홱 돌아서면서 쏜총에 쫓아가던 별동대원이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결국 범인은 끝내 도망치고 말았다.
범인이 누구였는가는 몇년전까지도 논란이 계속돼오다 조선공산당 소속 박상실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은 약 1년전부터 김장군이 운영하던 정미소에서 일하던 인물이다.
최근 중국측 자료와 증언이 공개되면서 박상실의 실체가 확인돼 암살배후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중국학계는 김장군 암살범은 조선공산당 아성총국에서 파견한 무장공작대원 공도진(公道珍)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결론이다.
박창욱(朴昌昱)전 연변대교수는 『공도진은 30년대에 주로 이복림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는데 그는 1928년부터 조선공산당 청년동맹에서 활동했고 김좌진 암살후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중국공산당 아성현위서기로 활동했다』며 『박상실과 이복림(공도진)은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20년대 후반 만주지역에는 화요파, 서울.상해파, ML파등 3파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서로 대립했다.
박상실은 화요파 소속이었다.
공산당은 해림시를 근거로 한 한족총연합회가 공산당 활동과 사상전파에 많은 지장을 주는데다 아예 기반마저 굳혀가자 겁을 먹고 있었다.
일제에 매수당한 화요파 박상실은 『김좌진이 일제에 정보를 제공한다』고 거짓 보고를 했고 이를 그대로 믿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김장군 암살을 결정.지시했다는 것이다.
결국 김장군의 암살은 북만주 독립운동단체들간의 이념적 대립을 이용한 일제의 음모와 조작된 정보를 그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