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 십리(十里)는 족히 됨직한 넓은 평원이 보기만 해도 가슴속까지 후련하다.

그들은 거칠것 없는 이 곳에서 적을 마음먹은대로 농락할 전투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또 주변을 둘러친 야트막한 산은 게릴라전술을 익히는 전투의 장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시냇물소리는 독립군가(軍歌)가 돼 풀어진 독립의지를 다지는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를 통해 1920년 근대사 최대 승첩으로 기록된 청산리전역에서 주역으로 우뚝설 수 있었다.

예부터 잣이 많이 난다고 해서 「잣덕」으로 불린 길림성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은 80여년의 세월속에서도 당시 모습을 그렇게 담아내고 있었다.

김좌진(金佐鎭)장군이 이끈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령부로 사관연성소가 자리했던 그 곳.

취재진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에 입소하기 위해 아홉구비 양의 창자같은 산길을 마다않고 걸었을 당시 조선청년의 기개를 상상하며 십리평으로 향했다.

왕청현에서 비포장길을 따라 80리가량 달리자 도로 옆으로 2백여가구가 가지런히 모여있는 서대파(西大坡) 십리평 잣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잣」은 잣나무를 의미하고 「덕」은 「더기」의 준말로 다른 지역보다 지세(地勢)가 높으면서도 편편한 땅이 넓게 펼쳐진 곳이라고 마을초입에서 만난 한 중국인은 설명해줬다.

1920년대 그렇게 불렸던 그 곳은 엄밀히 따지자면 십리평에서 8백여m가량 더 들어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을 앞으로는 왕청하(汪淸河)가 흐르고 뒤로는 산봉우리가 드리워진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으로 산간오지나 다름없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은 아마 이같은 지형·지세를 최대한 이용, 적의 동태를 감시하는 한편 마음놓고 훈련에도 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방 1m도 분간키 어려울 만큼 잣나무가 빼곡히 들어섰고 지형이 빼어나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 곳에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둥지를 튼 것은 1919년.

북로군정서는 대종교 무장투쟁 단체로 1911년 조직돼 대한정의단, 대한군정서 등으로 개편된 뒤 임시정부에 편입된 중광단(重光團)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1919년 중광단을 확대 개편한 북로군정서는 총재에 서일(徐一)장군을 비롯, 부총재 현천묵(玄天默)장군, 사령관 김좌진장군 등 새롭게 진용을 갖춘뒤 총재부는 왕청현 덕원리(德源里)에, 사령부는 십리평에 본부를 각각 마련했다.

사령관으로 부임한 김좌진장군은 우선 일본군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수전투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판단, 십리평에 사관양성소를 건립한다.

잣나무 수풀속에 은밀하게 8동(棟)으로 나눠 건립된 사관양성소는 18세이상 30세이하 청년들이 6개월 속성과정으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사관양성소 터는 이듬해인 1920년 일본군의 경신년 출병으로 병영과 사령부, 사관연성소 건물이 모두 소실되면서 현재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사관양성소의 교육과목은 체계적 독립군 양성기관이었던 신흥무관학교나 기존 독립운동계열 학교와 별반 차이점이 없었다.

정신교육과 군사학, 병기조작법과 부대지휘운영법 등을 다룬 술과(병법), 체조, 호령법 등이 주된 과목이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독립운동사 및 한일관계사를 집중적으로 교육, 조국의 정체성 확립과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확보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던 점은 눈에 띄는 대목이다.

또 군사훈련을 실시하기 위해 2개의 연병장이 따로 마련돼 있었으며 사격연습 때는 일본군 모형을 세워놓고 실전을 방불케하는 엄격한 교육이 실시되기도 했다.

이같은 체계적 교육을 받은 2백98명의 사관연성소 졸업생(1기·이후폐교)들은 그해 10월 청산리지역 10여개 전투에 참가, 무려 1천3백여명(최고 3천3백명)에 달하는 일군을 섬멸하는 쾌거를 올렸다.

동행취재에 나선 연변사회과학원 민족연구소 강용권(姜龍權)교수는 『근대사 최대 승첩으로 기록된 청산리전역에서 삭발 무장한 일본 정규군을 여지없이 무너뜨린 북로군정서의 출현은 그동안 독립군을 두부군대로만 여겨 오던 일본군에게 경계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며 『청산리싸움에서 북로군정서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고 말했다.

취재진은 이어 북로군정서의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하며 대종교 동도분사가 자리했고 중광단이 창설됐으며 군정서 총재부가 들어섰던 왕청현 덕원리로 향했다.

왕청현에서 북으로 대두천을 따라 대흥구(大興溝)쪽으로 10리가량 가다 오른쪽 유수하(柳水河) 초입에 들어서면 덕원리가 나온다.

이 곳은 19세기말 조선족 이주민들에 의해 개척된 뒤 1910년대 서일장군 등 대종교 신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