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북부여에 뿌리를 둔 고구려가 중원(中原)공략을 위해 일어섰던 곳.
일제치하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합을 촉구하는 대규모 연설회가 열렸고 의열단원들이 분연히 몸을 던졌던 곳. 천주교, 기독교 등 종교를 통해 조국광복의 비원을 담아냈던 곳.
강가에 핀 버들이 강심에 투영되면 백거이의 시 한구절이 떠오를 듯 아름다운 강변도시 길림(吉林)은 천년의 세월을 넘어 그렇게 이어져오고 있었다. 최근들어 화공, 야금, 전력, 제지 등 중공업이 들어서며 산업도시로 탈바꿈한 길림은 인구 1백50만명의 길림성 두번째 도시다.
24개 소수민족, 34만명이 생활하는 삶의 터전이기도 한 이 곳에는 현재 4만여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중국내 1개 시·현(縣)단위로는 연길(延吉)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조선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북만, 남만, 동만의 중심에 자리했던 길림은 이런 까닭으로 일제치하부터 식민조국을 떠나 만주에 정착한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다. 20년대 중반에는 3부(정의·참의·신민)중에서 실력이 강하고 관할구역이 넓은 정의부의 근거지 역할을 했다. 20년대 말에는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선생 주도로 3부통합회의가 빈번하게 열리면서 당시 독립투사들이 모이는 장소였다.
이렇듯 길림은 일제시대 나라잃은 설움을 달래며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독립에 앞장섰던 선열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1930년대 민족의 「아리랑수난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한 서린 만보산사건과 무장항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김동삼선생의 자취가 그 곳에 있다.
만보산사건은 1931년 7월 만주 만보산진 삼성보에서 재만(在滿) 조선인이 개간농지 수로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간계(奸計)로 중국농민과 충돌한 사건이다.
일제는 1920년말부터 중국 동북지역 침략을 위해 중국인과 조선인을 이간시킬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두 민족이 뭉치면 침략전쟁에 불리했고 두 민족이 헐뜯고 싸우게 되면 보다 쉽게 중국 동북지역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운 채 빌미를 찾기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 일제는 31년초 만보산지역에 모여든 2백여명의 조선인을 꾀어 중국인의 밭을 파헤치고 수로를 만들도록 교묘한 술책을 썼다. 모든 곡식이 여물어가는 7월, 아무리 대국적 기질을 가진 중국인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곡식 밭이 파헤쳐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리 만무했다.
조선족과 중국인간 유혈싸움은 이렇게 시작되고 일제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사실을 왜곡해 「중국사람이 조선사람을 학살한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국내로 퍼졌고 서울과 평양, 인천 등지에서는 화교를 학살하는 등 국제문제로까지 비화됐다.
더욱이 일제에 매수된 조선일보 장춘주재 김이삼(김의삼)기자가 「중국경찰이 조선농민을 죽였다」는 장춘발 기사를 송고, 파문은 확산돼 갔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만보산에서 양(兩) 국민은 한명도 사망하지 않았으며 반중국시위가 확산된 국내에서만 1백42명의 화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 오보로 양심에 가책을 느낀 김기자는 결국 진실을 폭로하기 위해 길림 동아여관에 투숙했다 낌새를 알아 챈 일본 밀정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김기자가 피살된 동아여관은 길림 중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6차선 해방대로(解放大路)에서폭 4미터가량의 좁은 광주가(廣州街)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는 상점이 들어서 있다.
시골동네를 연상하는 낡은 교차로 이정표가 앞에 자리하고 주변에는 20년은 족히 됨직한 8층높이의 층집(아파트)이 들어서 있다. 특히 주위에 몰려있는 철공소의 굉음과 해방도로에서 광주가로 진입한 차량들의 경적음까지 합세하면서 당시 역사의 현장은 묻혀져가고 있었다.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강용권(姜龍權)교수는 『예전에는 이곳 대부분이 늪지였으나 최근 복개공사가 이뤄지면서 주택가가 들어섰다』며 흔적없이 변해버린 당시 역사현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만보산사건은 김기자 피살 등 각종 의문이 꼬리를 물면서 일제의 간교한 계략이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면서 한·중 양 국민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게 된다.
이러한 반발과 비난속에 당시 길림에서 활동하던 김동삼 선생을 비롯한 1백여명의 3부요인들은 만보산사건에 대한 대책마련을 위해 길림에서 토구회(討究會)를 조직했다.
하지만 만보산사건은 중국 침략을 노리던 일제에 또 한번의 빌미를 제공, 2개월뒤인 9월28일 만주사변으로 이어지면서 전모가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역사로 남게 된다.
1928년부터 1931년까지 김동삼 선생을 보필했던 장인덕(張仁德)씨(89)는 『만보산사
[만주항일투쟁 현장답사-25] 길림성『만보산 사건과』一松 金東三선생
입력 1999-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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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07-16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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