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를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마장면의 도드람산, 동쪽에는 부발읍 효양산, 남쪽은 설성면의 노성산과 장호원의 백족산등 영산이 주변을 감싸는 지리적 특성으로 지역 특유의 향토유적과 애증어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이천(利川)의 유래를 살펴보지 않고 이천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할 정도로 이천은 명칭부터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고려 이전에는 남천(南川)·남매(南買)·황무(黃武) 등으로 불리다 고려가 건국하면서 지금의 명칭을 얻게 된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남천을 관통하는 복하천(福河川)에 이르렀을 때 홍수가 나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때 이 지역을 잘아는 서목(徐穆)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길을 인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왕건이 가상히 여겨 “학문과 덕을 쌓고 몸을 기르면 험난한 과정이랄 수 있는 대천(大川)을 건너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며 온천하가 이롭게 된다”는 주역(周易)에 나오는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利'자와 '川'자를 따서 '利川'이라는 명칭을 하사한 이래 지금까지 불려오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천은 지금도 천혜의 기후와 토양, 물이 어우러져 최고 품질의 이천쌀이 생산되고 있으며 주류와 식품공장이 즐비하다.
이천시 향토유적 제14호인 영월암(映月庵)은 이천의 진산(鎭山)인 설봉산 주봉 기슭에 자리잡은 이천의 대표적인 고찰이다. 경내에는 고려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향토유적 제3호인 석조광배(石造光背)및 연화좌대(蓮花座臺), 그리고 석조(石槽)3층석탑 등이 긴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어 영월암의 창건연대는 대략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로 보고 있다.
조선 후기인 영조 50년에 이르러 영월 낭규대사가 큰 불사를 일으켜 중건했으며, 1911년 보은 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920년에는 주지인 유신암 스님이 극락전을 세웠다. 또한 1937년 조원우 스님이 산신각과 누각인 단하각을 중건했다.
현재의 영월암은 대웅전과 부속건물 3동으로 이뤄졌으며, 3층석탑 석조광배와 8각 연화등의 유물은 무너진 채 방치돼 있다 지난 81년 복원됐다.
영월암 대웅전 뒤편 높이 10m 두께 4m의 바위면에는 마애여래입상(높이 9.6m, 어깨폭 3m가량)이 근엄한 모습으로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산수유 마을에는 향토유적 제13호인 육괴정(六塊亭)이 자리해 있다.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를 중심으로 지치주의와 현상정치를 추구하던 신진사류들이 몰락, 이때 난을 피해 낙향한 남당 엄용순이 건립했다.
육괴정은 당대의 명현인 모제 김안국과 엄용순 등 여섯 선비가 모여 시회와 학문을 강론하며 우의를 기리는 뜻에서 정자 앞에 못을 파 연을 심고 각각 한 그루씩 모두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세월이 지나면서 연못은 메워지고 6그루의 나무중 3그루가 고사했으나 후손들이 다시 심어 지금도 푸르름과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건물은 팔작(八作)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은 본당과 이를 둘러싼 담장, 대문으로 돼 있어 정자가 아닌 사당의 형태다. 본당의 규모는 정면 9m 측면 3.78m다.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 향토유적 제8호 마애삼존석불은 모가면 마옥산 부처바위라 불리는 마애여래좌상에서 7m아래 지점에 위치한 화강암 자연석 위에 조각돼 있다.
삼존불은 남서쪽을 향한 편평한 자연석 면에 조각됐으며 모두 결가부좌한 좌상의 형태다. 신라시대의 토우나 미개종족의 신상에서 볼 수 있는 희화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특징이다.
바위면 상단에는 원호의 비수구가 마련돼 있고 하부에는 본존에만 연화좌가 있으나 지금은 매몰돼 있는 상태이다.
소박하고 장난기 어린 표현이 친근감을 더해 주는데 조성연대는 대략 고려중기 이후로 추정된다.
이밖에 향토유적 제4호인 지석리 지석묘, 5호 관고리 5층석탑, 6호 관고리 입상석불, 7호 갈산리 석불입상, 10호 선읍리 입상석불, 15호 애련정, 16호 권균묘역등 많은 향토유적이 이천의 역사만큼이나 지역에 산재해 있다. <이천>
◆ 삼형제 바위의 전설
이천시 설봉산 영월암 왼쪽 능선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세개의 넓고 편평한 바위가 어깨를 마주대고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바위가 삼형제 바위다.
옛날 산밑 마을에 가난한 삼형제가 늙고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살림이 워낙 어려운 탓에 삼형제는 매일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형제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우애도 남달리 두터웠다. 어느날 삼형제는 평소와 같이 설봉산으로 나무를 하러갔다. 그런데 돌아올 시간이 돼도 삼형제가 돌아오이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