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용인은 이 길로의 선구적 구도자와 탁월한 경륜가 한 사람씩을 그 대지에 품으며 약탈적 성장의 마지막 구비를 향한 사활적 경쟁에 돌입하였다. 구봉산의 지맥인 조비산 아래 엎드려 계신 실학의 비조 반계 유형원 선생과 문수봉의 북쪽 평야 경안천 상류의 언덕배기에 누워 못 다 이룬 꿈 몰아 쉬고 계신 번암 채제공 선생이 그 분들이시다.
개항, 청일전쟁, 노일전쟁으로 이어지는 거센 외세의 도전 앞에서 두 분의 전망과 노력이 차츰 빛을 잃어가는 가운데 그 불씨를 지켜가던 갑오농민전쟁, 의병전쟁 과정에서 용인지역도 그 대오에서 빠지지 않았다. 동학 직곡접주 이용익, 김량접주 이삼준, 죽산부 농민 우성칠 등 농민군과 양지군 전 농상공부 주사 임옥여, 죽산부 농민 정주원, 모현면 해직군인 이익삼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국권 수호를 위해 투쟁하였다.
거족적 항쟁도 헛되이 강도 일본 앞에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던 날, 임오군란·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그 영욕을 이어오던 민씨 가문의 대신 민영환이 자결로 봉건 세도가의 죄값을 치르고 석성산 아래 탄천 벌에 뼈를 묻었다. 반면 그의 식객이던 송병준은 갑신정변의 주모자 김옥균의 자객으로 도일했다가 친일파로의 길을 잡은 뒤 마침내 을사오적으로 일제 하에서 부와 명예를 도둑질하였다. 그렇게 그의 주군이 묻힌 용인 땅안 지척거리인 양지면에 호화별장을 짓고 부끄러운 한 세대를 보냈겠거니 하며 바라보니 지금도 30여개의 행랑채가 남아있고, 무슨 호화 요정으로 쓰였을 법한 경내에는 교회와 연립주택이 들어서 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이후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의병의 씨를 말리고 ‘토지조사사업’으로 수탈을 위한 정지작업을 마치면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노골화되어 갔다. 용인 지역에서도 구 황실 재정원이었던 궁장토, 역둔토를 조선총독부가 강탈하여 동척, 가토 농장 등 일본인 대지주에게 불하하였다. 그런 가운데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하자 러시아에서는 소비에트 권력이란 새로운 세계사적 실험이 시작되고 이어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이 고양되어갔다.
3·1운동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아래서 터져 나왔고, 용인군내 전체 지역에서도 민족대표, 지식인, 종교인, 청년학생, 농민, 노동자, 소부르주아지, 양반 유생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그 결과 국내에서는 ‘문화통치’란 기만 전술이 유포되는 가운데, 김혁 등은 만주로 싸움터를 옮겨가고 있었다.
제국주의 진영이 세계대공황을 맞자 일제는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도발함으로써 이를 돌파하려 하였고 농민, 노동, 청년 운동은 신 사조의 도입, 적색 농노조의 결성 등 혁신의 길을 모색해갔다. 동척농장에서의 소작료 불납동맹 결성을 통한 투쟁, 용인수리조합 노동자·경동철도(수여선) 노동자 투쟁, 백암청년회를 비롯한 각 청년단체의 야학 운동 등이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용인 지역에서의 대표적 사례다. 적산불하와 농지개혁을 통하여 용인지역에서도 농지 분배가 이루어졌지만, 절반 정도가 농지 분배 대상에서 빠졌을 뿐 아니라 가격 정책, 조세 정책의 실패로 농가 경제는 악화 일로를 걸어갔다. 게다가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하여 전 민족적으로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당한 가운데 용인에서도 인구의 14%에 달하는 전쟁 재해민이 발생하였다.
일제, 미군정, 이승만 정권의 깊고 깊은 수렁을 헤치고 창조적 균형을 향해 나아온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꿈은 4·19 혁명과 5·16 쿠데타에 의해 또 한 굽이의 우회로를 거쳐가게 된다. 중앙집중화가 심화되고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정책이 추진되면서 용인 지역에서도 영세농가가 대량으로 이농하게 되고, 제조업 인구의 증가 현상이 나타났으며 경부고속도로, 영동고속도로 개통으로 땅 투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상징적으로는 세원의 중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