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은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농경문화가 꽃을 피웠고 농촌진흥청과 함께 근세 녹색혁명을 주도하였으며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의 건축으로 조선시대에는 민생왕권의 기틀을 확립했고 경기도청과 함께 경기도의 수부도시이자 월드컵 개최도시로서 세계속의 수원으로 비상하고 있
수원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이 서로 대립하던 저 옛날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중심지였다. 한강 유역의 기름진 땅에서 일찍이 농경문화의 터전을 가꾸어온 수원이 주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역사발전의 순환법칙. 고구려의 끈질긴 남하정책으로 고구려 영토가 남양만에서 죽령을 잇는 선에 도달하자 백제와 신라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일종의 공수동맹인 나·제동맹(493년)을 맺기에 이른다. 이때 고구려의 매홀군(買忽郡)으로 불려온 수원지방이야말로 오래 전부터 고구려·백제간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양국이 탐을 내는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강유역을 가슴에 품은 수원의 역사는 민족사의 발전 궤적에 핀 한떨기 찬란한 꽃이었다. 팔달산의 고인돌, 여기산의 청동기 유적움집터에서 발굴 조사된 철도끼, 철화살촉, 철칼, 철톱 등 농경시대 생활공구에서 수원지방의 생활문화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서까래와 그 위에 갈대를 엮어 덮은 지붕이 고스란히 발견되었고, 특히 철톱의 출토는 당시의 주민들이 톱으로 나무를 켜서 집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주거지 주변에서 채집한 토기의 밑부분에 볍씨자국이 있었고 진흙에 볏짚을 넣어 익힌 흔적이 뚜렷하게 발견되었다. 이는 수원지방이 무늬없는 토기 중기부터 벼농사가 크게 성행했으며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와서는 볏짚을 사용하는 등, 주민들이 근대의 농촌을 연상케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수원지역은 그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볼 때 두 번의 전기가 있었다. 그 첫번째가 18세기 후반 정조의 화성축조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비상(飛翔)한 것이라면, 두번째는 20세기 후반인 1967년 경기도청이 수원에 정착함으로써 60년대 이후 수부도시로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웅비(雄飛)한 것이라고 하겠다.

2세기에 걸친 격동의 역사 속에서 수원은 신흥 수부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문화도시의 상징인 화성이 복원되었고, 삼성전자, 선경합섬, 연초제조창의 수원정착으로 경제적 기반을 굳혔다. 수원은 화성(華城)이 포용한 문화와 산업단지를 양대축으로 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다.

삼한시대 수원지방은 한강이남의 토착세력인 진국(辰國)의 독자적인 지배권이 형성되어 있었던 지역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한조에 따르면 마한이 54국, 진한과 변한이 각각 12국씩 모두 78국으로 구성돼 경기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였다. 이때 수원지역과 역사적으로 직접 관련이 닿는 곳은 원양국(爰襄國), 상외국(桑外國), 모수국(牟水國) 3국이다. 원양국은 지금의 화성시에 속해있던 재양현 지역이고, 상외국은 화성시의 장안·우정면 일대로 추측된다. 원양국과 상외국이 수원시 승격이전의 수원관내에 해당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수원시 일원만을 놓고 볼 때 삼한시대 수원지역은 마한의 모수국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수원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이었다가 고구려가 영유할 때 매홀군으로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에 수성군(水城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건국 이후에는 940년(태조 23) 수주(水州)로 다시 바뀌면서 승격되어 주지사가 배치되었고, 1271년(원종 12)에는 수원도호부로 되면서 목사(牧使)의 부임지인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1310년(충선왕 2) 지방제도가 변경될 때 수원부(水原府)로 강등되었다가, 조선개국 이후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의 개편때 도호부(都護府)가 되었다. 고려때 전·후·좌·우보 제도를 채용할 때 수원은 전보(前保)가 되었고, 이후 조선시대 4대 유부(수원·광주·강화·개성)의 하나로 문화·경제적 요충지로서 역사발전의 중심축을 이뤄왔다.

수원이 국난극복의 전략적 거점이 되었던 역사적 사건은 광교산의 김준용 장군 병자호란 전승기록이 말해준다. 1636년(인조 14) 12월 강추위가 몰아닥친 속에 겪어야 했던 참담한 국난.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의 농성을 해야했고 근왕병의 지원은 겹겹이 포위한 청군으로 인해 차단된 상태였다. 청태종의 13만군을 상대하여 나라의 운명을 지켜야하는 고되고 험난한 시기. 이때 김준용 장군은 호남절도사로서 병사를 모집해 13일만에 수원에 도착, 남한산성과 지척간으로 전략적 요충지인 광교산에 웅거한 청군과 일대 접전을 벌인다. 남한산성을 구하려면 반드시 이곳에 포진한 적진을 격파해야 했다. 청군의 대장도 청태종의 신임으로 그의 사위가 된 양고리(揚古利)였으니, 김준용 장군의 광교산 전투는 양웅(兩雄)이 대치한 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새벽안개를 이용해 김준용 장군의 진을 급습한 청군은 그 기세가 풍우와 같았다. 이에 장군은 큰소리로 “이때야 말로 충신이 국가의 은혜에 보답하는 때다”라며 군사를 지휘한다. 피아의 함성이 천지를 진동하는 광교산 계곡에서 종일토록 진행된 일진일퇴의 결전. 드디어 장군의 포대에서 날아간 포환이 적장에 명중함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