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水原), 왕권과 민생을 함께 담은 최초의 신도시
수원에는 아직도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正祖)의 원행(園幸)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유형의 흔적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화성(華城)이다. 석전(石塼) 읍성인 화성은 1789년에 정조 임금이 아버지 장헌세자의 원(園)을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華山)으로 옮기고 그 부근에 있던 읍치를 수원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다. 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이 건립되었으나 대부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성곽 일부와 함께 소멸되었다.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외롭게 남아있다가 다행히 최근 화성행궁이 복원되어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임금의 효심이 축성의 계기가 되었던 화성은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서 뿐만 아니라 당파정치의 근절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구상이 담긴 흔적이기도 하다. 경기지역은 화성축조 이전만 해도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을 따라 발전해 왔으며 그 요지마다 핵심 양반세력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조는 남북을 잇는 화성행차를 통해 소외된 지역세력에게 힘을 실어주어 그 축을 바꾸고자 하였던 것이다.
임금의 거둥길을 필로라고 하는데 지금은 효행로라고 부르는 이 길은 군데군데 끊어져 있는 상태다. 동작진(銅雀津)을 건너 남하하는 역로가 지지대가 있는 미륵고개를 넘어 수원 관내로 접어드는 초입에 파장동 미륵당이 있으며 더 내려오면 정조가 내탕금을 하사하여 심었다는 노송들이 울창한 노송로가 나온다. 이 길가에 총 35기의 선정비가 나란히 서서 이곳이 옛 진입로였음을 보여주며, 서호천 상류를 가로지르는 다리 남쪽에 수령 200년이 넘는 느티나무군락도 옛 역로임을 나타낸다. 일용리, 여의교, 만석거, 기하동, 대유평, 영화역, 관길야를 거치면 화성 북문인 장안문에 이르렀으며 이어 만년제를 거쳐 현륭원에서 필로는 멈추었다.
정조의 원행이 가져다 준 효과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를 계기로 수원은 광주(廣州)와 더불어 삼남(三南)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부각되었다. 그 중심 역원이 바로 장안문 밖의 영화역(迎華驛)이다.
화성 축성 이전까지 서울을 떠나는 주요 시발점은 양재역이었으며 광주에 이르러 용인과 수원으로 길이 나뉘는데, 용인의 구흥과 김령을 경유하여 죽산과 음죽으로 이어지는 길이 대로(大路)였던 반면 수원으로 가는 길은 낙생역에서 갈라지는 간로(間路)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잦은 원행에 따라 수원으로의 길이 크게 열리고 1795년 원행 때는 안양과 시흥을 잇는 새 길이 마련됨으로써 지금처럼 수원이 충청남도와 전라도로 가는 대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양재에 두었던 찰방역(察訪驛)이 신설 영화역으로 이관된 것도 그러한 변화의 반영이었다.
정조 임금은 성군답게 행차가 가져다 줄 민폐를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가지 자급기반을 마련하였다. 행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둔전(屯田)을 조성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둔전 운영을 위해 만석거(일왕저수지)와 축만제(서호) 등 저수시설을 만들었고 주민들에게는 경작에 필요한 소를 키우도록 권장하였다. 우만동(牛滿洞)이나 지소동(紙所洞)은 물론이고 조원동(棗園洞), 율전동(栗田洞), 이목동(梨木洞), 시목동(枾木洞) 등의 지명에 들어있는 조율이시가 제수 공급과 관련하여 붙여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나 두었던 시전(市廛) 거리를 조성하였다. 읍지(邑誌) 기록에 의하면 장사를 할만한 수원 사람들에게 1만5천량을 대여하여 입색전(立色廛), 어물전(魚物廛), 목포전(木布廛), 미곡전(米穀廛), 유철전(鍮鐵廛), 관곽전(棺槨廛), 지혜전(紙鞋廛) 등의 점포를 관문 밖 대로주변에 개설하게 하니 사람들이 몰려들고 시전이 번성하여 완연히 대도회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였다.
수원의 소갈비 요리가 전국적인 명물이 된 것은 해방 후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곰탕이나 설렁탕이 전국의 소가 집결했던 서울에서 발전했던 것과 같은 이치로 수원에서도 정조 이후부터는 쇠고기 음식이 발달할만한 충분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넓은 둔전 땅을 경작하기 위해서는 소는 물론 소를 부릴 일꾼도 많아야 했기 때문에 마땅히 경작할 땅이 없는 전국의 농민들이 모여들었고 시전의 활성화로 상인들도 모여듦으로써 수원은 자연히 경제규모가 큰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상설점포인 시전을 두게 된 수원은 사방이 장길로 연결되는 시장권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원 주변의 장시는 북쪽으로 서울 방면, 동쪽으로 용인 방면, 남서쪽으로 남양·발안 방면, 그리고 남쪽으로 평택 방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모두가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점이 공통이다. 안양~군포~수원~오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용인~광주를 경유하는 경로는 역로 가운데에서도 대로에 해당되니 말할 것도 없고 세류천~고색~
[다시보는 경기산하 - 수원] '正祖의 꿈' 담아낸 三南잇는 최초신도시
입력 2002-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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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1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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