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가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긴 장년으로 성장했다. 군사독재와 유신, 민주화 투쟁 등 한국사의 격변 현장과 함께해오며 질곡의 삶을 살아온 경인일보가 이제는 21세기 새시대 주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창간 42주년을 맞아 지난시절 창간기념호에 담았던 '그 때 그 시절' 사건을 통해 기사가 반영하는 당시의 사회상을 되짚어본다.

서민들의 삶과 당시의 정치·경제상황 등에 대한 궁금증의 해갈과 함께 그동안 잊고 살았던 과거의 아련한 희비의 기억도 떠올리게 한다.

아울러 과거의 보도를 뒤적이며 경인일보의 미래상을 설정하는 기회를 가져본다.

△1960년

본보 창간해인 60년은 3·15부정선거와 이를 규탄하는 4·19의거, 뒤이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4월26일) 등 들끓는 민주화 투쟁으로 전국이 한시도 평온하지 못했다.

그해 본보 창간호(9월1일)에 게재된 사회면 사건·사고란을 들춰본다.

○…“三十一일 인천서에서는 여러 부량배로부터 윤간을 당하였다는 서(徐0順=十六 시내 昌榮同)양의 고소제기에 의하여 피소자중의 한명인 시내 송림동 三0 김(金然石=二二=工員)을 구속하였다. 알미늄공장의 직공으로 있다는 김은 지난 5월 중순경 서양이 김(金豊一=二三)외 一명으로부터 욕을 본 사실을 알고 감염된 성병을 고쳐준다고 도원동 소재 전도관 뒤 잔디밭으로 끌고가 강제로 또 욕을 보였던 것이라 한다.”

성관련 범죄행위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요즘 같으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가해자의 실명을 그대로 표기해 실소를 자아내고 있다.

△1965년

64년부터 대일 굴욕외교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데모가 곳곳에서 이어졌다. 65년 4월3일 한일 양국 외무 농림장관의 한일문제 3대 현안(어업·청구권·교포지위)에 대한 가조인 공동성명이 발표되면서 대학생과 시민들의 반대가 극에 달했다.

그해 9월1일자 신문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수원의 농촌진흥청을 방문, 전국지방장관회의를 가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도 해학적인 사건들을 기사에 반영, 눈길을 끌고 있다.

당시 창간특집 9월7일자 사회면 기사의 한 대목이다.

○…일반금융과 농민들의 농사자금을 취급해 많은 손님들이 드나드는 시내 해안동 소재 부천농협은 뻔질한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변소간은 그 악취와 구더기로 선보이고 있다.

손님들께서는 용변 한번 할려면 먼저 구두발로 구더기를 퇴치한 다음이라야 할 판이니….

아무리 경제관념이 철두철미한 금융기관이라지만 변소청소비와 살충제값을 절약해 '구더기 무서워 저축못할 소냐'하고 저축하신 것은 아니시겠지.

요즘과 비교할 때 상상이 안되는 격세지감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금융기관들의 고객서비스 경쟁은 치열했음을 엿볼 수 있다.

△1970년

섬유가공과 신발제조 등 경공업이 국가 기산산업으로 육성되면서 경제가 조금씩 나아지는 시기였다.

당시 유행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선풍을 일으킨 장발과 미니스커트.

그해 9월3일자 창간특집호에는 이같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과 장발족에 대한 검거기사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인천 '히피'차림의 더벅머리족을 단속한 인천경찰서는 2일 동인천역앞 인영극장의 럭키악단 쇼공연장을 급습, 장발의 젊은 히피 윤무병(21·인천시 동구 송현동)군 등 50명을 검거, 본인의 의사를 들어 모두 머리를 깎아 훈방했다.

△1975년

유신헌법에 대한 시민과 대학생들의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정부가 국민투표를 실시, 70%이상의 국민찬성을 얻어낸 뒤 이에 승복하지 않은 대학생과 시민단체 등을 옥죄며 강압적인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각종 시위가 잇따랐지만 사회를 안정적 기반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강한 정부를 만들 수 있는 유신헌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역설을 펴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각종 복지정책을 회유책으로 내놓았다.

이 해 9월3일자 사회면 톱기사에는 '국민학교 과밀학급 해소안돼'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문교부로부터 과밀학급 해소를 위해 1백19학급을 배정받은 도교위는 도시지구 중심으로 새학기부터 학급을 증설, 학급당 인원을 70명선으로 줄이기로 했지만 학교분포가 도심지로 밀집되지 않아 학교에 따라 학급당인원은 심한 격차를 드러내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특정학군 선호경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정부가 과밀학급 해소에 적극적인 정책을 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

10·26사태 이후 정권을 거머쥔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철권통치시기로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을 탄생시킨 가장 혼돈의 시기였다.

그 당시 방송의 경우 메인뉴스시간에 '땡 전(全)…'으로 시작할 정도로 국내 언론사들의 모든 기사가 전두환 대통령 관련기사로 시작했다.

당시 9월1일자 본보 1면 톱기사도 '평화적 정권교체 반드시 확립-전두환 11대 대통령 취임사서 밝혀'라는 제목의 취임기사와 함께 1면 전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