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하와이에서 인정받고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데엔 애국심과 교육열에 불타는 여성들이 있었다. “하와이 이민역사는 남자들의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역사”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여성들의 활동은 대단했다.
“하와이를 선택한 대부분의 여성들이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조국을 떠났다는 주장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왜곡된 부분도 있고, 당시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낮았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이덕희(61) 부회장의 얘기다.
한 이민 여성의 삶을 보면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1912년 18세의 꽃다운 나이에 하와이 이민선을 탔던 사진 신부 이혜경은 가구공장에서 일하던 권은덕(당시 24)과 결혼해 딸을 난 뒤 1915년 딸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그는 이화여전을 다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해 투옥됐다가 이듬해 1월 석방됐다. 이어 그 해 8월 다시 하와이에 들어가 남편과 살면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더 낳았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지 않았다. 사회 활동을 많이 했고 자녀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다. 맏딸이 일본인 청년과 사귈 때는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삶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떠나온 모국에서 찾으려고 했다.
“처음 20년은 적응의 시기였지요. 새로운 환경과 익숙치 않은 농장생활 또 나이든 남편들과 결혼생활 등 모두가 힘겨운 이민생활에서 기초를 닦는데만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이 부회장은 “하와이 한인 여성들은 돌아갈 조국이 없었기 때문에 고국에 돌아간다는 생각보다 이국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녀들 교육에 전념해 훗날 조국의 국권 회복에 기여한다는 마음이 컸다”며 “3·1독립운동 소식을 듣고는 국권회복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조국독립이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안건으로 바뀌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으로 볼때 하와이 한인 여성들은 조국의 여성들에 비해 깨 있었다. 조국을 위한 애국심에 불탔고 그 애국심은 자녀에 대한 철저한 교육열로 이어졌다.
하와이 한인 여성들은 적십자와 같은 조직체인 대한부인구제회를 결성한다. 한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부상당한 이들의 가족을 위해 성금을 모아 보내고,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지원금을 보내는 등 활발한 운동을 계속했다. 특이한 것은 이들 여성단체 회원들은 사실상 가족의 생계를 떠맡았다는 것이다. 남편을 잃었거나 나이들고 별로 마땅한 직업이 없는 남편들을 대신한 의식주 해결은 부인들의 몫이었다. 또 여성들의 단체는 의무금이나 회비가 아니라 단체활동으로 벌어들인 이익금으로 활동을 계속한 적극적인 조직체였다.
부인회의 설립 배경은 이렇다. 1910년 이전에 조직된 것으로 알려진 '신명부인회'는 정치와 사회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1909년 4월 설립한 '부인교육회'는 부인들의 교육을 담당했다. 1913년에는 적어도 4개 단체가 있었고, 다른 섬에도 이들의 지부를 두었다. 1913년 이들 단체가 통합해 '대한부인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제에 강점된 조국을 위한 애국심에 불탔다. 1919년 3월15일 각 지부 대표 41명이 모여 '대한부인구제회'로 이름을 고치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선포했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500여명의 사진 신부와 500여명의 두고 온 부인들이 하와이에 도착함으로서 한국 부인들의 조직은 더 커지고 그 활동도 활발해졌다.
대한부인구제회 이외에 1919년 5월에는 '한인 소녀회'가 조직돼 미 본토, 영국, 프랑스 등의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같은해 2월 호놀룰루 여자기독청년회(YWCA)는 한국 출생 부인들에게 길거리 표지판 읽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는 방법, 옷 만들기 등 실생활 교육을 실시했다. 또 부모들과는 생활방식을 달리했던 한인 2세들에 대한 문화공간도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1928년 9월에는 경상도에서 온 부인들이 '영남부인실업동맹회'를 만들어 저축을 독려하고 한국 상품을 수입해 실업발전에 노력하기도 했다. 이 조직은 이후 한인여성상의회의 효시가 된다. 이들은 이미 1913년부터 한복을 개량해 입고, 마약사용금지운동, 신학문과 영어 교육 등에 힘쓸 것을 강조하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밖에 각 교회에 소속된 부인회 회원들도 교육활동을 활발히 했다. 하와이 최초 여성교육장(2001년 페트리샤 하마모토 한인 3세)과 아시아인으로는 최초로 연방판사를 역임하고 주 대법원장에 임명된 헐버트 최(한인 2세) 등 이런 여성사회의 노력의 성과로 나타났다.
이덕희 부회장은 “조국의 자주성을 잃었던 시기에 하와이에 살았던 부인들은 진한 조국애와 자녀들의 교육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며 “이들이 2세에게 준 영향과 교육열은 오늘날 하와이 한인 후세들이 지역사회에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말했
[하와이 이민100년 현장을 가다] 이민 여성들의 삶
입력 2002-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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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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