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온갖 수선을 피며 배낭을 싸는 나를 예시가 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어제 저녁 밖에서 만났을 때에도 내일 '잠무'로 갈 거라는 이야길 했는데, 오늘 아침 문밖에서 청소를 하면서도 내겐 아무 관심도 없는 척 딴 짓만 하던 예시는 게스트하우스가 운영하는 천막카페 닉스(Nick's)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카운터에서 방 값을 계산하며 주인 내외에게 인사를 마칠 때까지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예시의 행동이 조금은 서운했으나 나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예시를 찾지는 않았다. 그런데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그때서야 주방 쪽에서 그의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굿바이, 디디(누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 밝아서 오히려 물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끝내 예시는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린 친구 사랑스런 예시, 그만의 이별법이었다. 멕레오드간지를 떠나 로워다람살라로 내려올 때까지 예시의 목소리는 나를 따라왔다.
델리에서 출발했을 경우 잠무를 거치지 않고 스리나가르로 가는 길은 없다. 버스를 탔다. 늙은 차장에게 잠무까지만 갈 것이니 잊지 말고 알려달라고 당부를 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마냥 느린 버스가 7시간쯤 달렸을까? 차장이 “잠무, 잠무!” 하고 소리를 질러 버스 지붕에 올려놓은 배낭을 찾아 내려보니 시간은 벌써 17시를 지나 있었고 터미널도 아닌 시내 대로에 나를 내던진 버스는 어느새 뿌연 먼지 속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내가 잘못 내렸는가? 이곳이 잠무가 맞긴 맞는지? 워낙 날씨도 덥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과 온통 시내가 먼지투성이라 시야가 불투명한 건 두말할 나위도 없고 소음이 극에 달해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래, 이건가? 이걸 보고 아비규환이라고 하나?
배낭은 왜 그렇게 어깨를 누르는지,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소음 따위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던 나는 달리는 차를 피해 교차로 밑으로 내려섰다. 교각 건너 번잡한 곳이 잠무 터미널인가보다. 일단 스리나가르 행 차편을 알아보려면 터미널로 가야하는데 걸음이 쉽지 않다. 눈 닿는 곳마다 더위에 지친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은 전쟁 중 폭격이 끝난 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모두가 처참해 보일 뿐 아무리 둘러보아도 깔끔한 행인이나 건물 등은 눈 씻고 봐도 없다. 길거리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숨이 멎은 짐승처럼 꼼짝도 않는다. 저 많은 사람들, 정말 살아있는 사람들인가 싶었다. 거리에 있는 경찰관에게 물어 걷다가 다시 심호흡을 하며 몇 번을 물어본 후에야 겨우 터미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머리는 산발하고 하루 종일 지칠 대로 지친 나도 누가 보면 저들과 다름없는 허기에 지친 비렁뱅이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특별히 그들만 이상할 것도 없다.
다시 두통이 시작되고 속도 영 안 좋다. 스리나가르로 곧장 가야겠다는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쉬어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건장하게 생긴 청년을 붙잡고 내가 물어본 것은 조용하고 깨끗한 호텔이었다. 조용하고 깨끗한 호텔? 그렇게 묻고 보니 한심한 건 내 자신이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조용하고 깨끗한 호텔을 찾다니! 그렇게 한참을 길에서 서성대다 보니 나중엔 아예 걸을 힘조차 없어 다시 정신을 추스르고 보니 바로 터미널 3층에 호텔이 하나 있기는 있었다. 나로서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올라가니 끈적거리며 달려드는 열기와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음까지 음침하기 이를 데 없는 최악의 소굴이다. 방은 넓었지만 무엇하나 반듯한 것은 없고 그래도 내 눈을 자극시키는 것은 침대 곁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이었는데 아주 오래 전에 구입한 한국의 대우 마크가 그것이었다. 종업원은 텔레비전까지 있다고 자랑하며 벽에 붙은 스위치를 올려 선풍기를 틀어주었지만 땀을 식힐 정도의 바람은 생각조차 않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몸을 씻고 밥을 먹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데 작은 보조 가방 주위에 뭔가 스멀스멀 움직이는 게 보였다. 가방을 열어보니 잠깐 사이에 먹다 남은 오징어와 육포냄새를 맡고 개미들이 까맣게 몰려든 것이다. 너무 놀라 봉지를 베란다 밖으로 냅다 던지며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방은 벌레들의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비싼 호텔비가 아까웠지만 밤중이라도 차편만 있다면 잠무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어딘가에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 방의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이날 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잠무보다 힘들까하는 위로의 말을 하게 되었다.
어둡기 전에 식사를 해결해야할 것 같아 밖으로 나가보았다. 오늘 하루 이 소굴에서 견뎌낼 일이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몽상은 나를 더욱 초조하고 불행하게 만들었다. 시내도 둘러볼 겸 식당을 찾아 터미널 뒤쪽으로 올라가니 제법 큰 시장이 나타났다. 가게마다
[라다크, 고원의 바람] 7. '혼돈의 도시' 잠무
입력 2004-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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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1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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