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자긍심의 원천인 김병화 회장 동상. 김병화 회장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과 함께 협동농장을 운영, 고려인의 우수성을 구소련 전역에 떨쳤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김병화 농장'은 구소련 전지역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입증한 상징물이며 자긍심의 원천이다.

구소련시절 무수한 협동농장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생겨났지만 고려인들이 주축이 된 '김병화 농장'의 생산성과 생산력은 타지역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도 고려인들은 '김병화 농장'을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고 김병화 회장을 '영웅'으로 칭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치르치크 구역에 위치한 김병화 농장을 찾았다. 가는 길에는 '김병화 거리' 등 김병화 이름을 딴 거리와 시장들이 있었다.

농장은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을씨년스러웠지만 장작 타는 냄새와 굴뚝을 타고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는 한국의 농촌을 연상시켰다.

김병화 농장은 1937년 연해주에서 강제이주 된 고려인들이 모여 '북성별'이라는 이름의 협동농장으로 시작됐다. 당초 연해주에 있었던 농장이름을 그대로 따와 붙인 것이다. 군인이었던 김병화 회장은 1940년 구소련정부에 의해 회장으로 선임됐고 이후 농장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농장에서 생산된 목화와 밀은 생산량은 물론 질적인 면에서도 뛰어나 구소련 정부는 다른 지역 협동농장 간부들을 불러 김병화 농장의 운영방법과 고려인들의 근면성을 배우도록 했다.

사유재산이 인정되지 않는 공산사회에서 유독 생산성이 늘고 있는 김병화 농장은 구소련 정부에서도 연구대상인 셈이었다.

결국 김병화 회장은 협동농장의 뛰어난 운영성과를 인정받아 48년과 51년 구소련 정부로부터 2차례에 걸쳐 '노력 영웅' 칭호를 받는다.

우즈베키스탄 역사상 노력영웅 칭호는 단 3명만 받았으며 이중 1명이 바로 김병화 회장이라는 점 때문에 고려인들은 지금까지도 엄청난 자긍심을 갖고 생활하고 있다. 특히 구 소련 전지역에서도 2번씩이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우즈벡 독립이후 김병화 농장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마을회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젊은이와 아이들은 거의 찾아 볼수 없었고 나이든 노인들만이 간혹 눈에 들어왔다.

농장은 청년들의 도시행 외에도 농기계구입비 지원 등 과거 주어지던 각종 혜택이 독립이후 없어진데다 생산한 목화와 밀 등 농작물을 국가가 강제로 헐값에 매수하면서 힘겹게 운영되고 있었다.

김병화 농장 이인노겐지(64) 회장은 “젊은층이 농장을 떠나면서 2천㏊의 농지중 500㏊만 경작되고 있고 그나마 정부가 시중가에도 못미치는 가격으로 목화와 밀을 강제 매수해 농장 상황은 말이 아니다”고 털어놨다.

강제이주 2세로 한국말을 못한다고 했던 이 회장은 인터뷰가 계속되자 한국말이 조금씩 기억난 듯 더듬더듬 한국말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 회장은 특히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 회장은 “우즈벡에도 대우와 삼성 같은 한국 기업들이 많이 들어와 한국의 좋은 이미지를 이곳에 심고 있다”며 “특히 발전된 한국의 모습은 고려인들의 위신도 덩달아 높여 놨다”면서 “한국 정부가 중앙아시아에 지역 고려인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그러나 “단지 금전적 지원의 관심이 아니라 뿌리 없이 힘겨운 세월을 지내온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국민'이라는 한국 정부의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오는 2005년 김병화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지난해 여름 '김병화 재단'을 설립한 이 회장은 전 CIS지역 고려인들에게 편지를 발송, 기부금을 요청해 놓고 있다.

이 회장은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김병화 회장의 정신을 기리고 기부금을 받아 고려인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에 사용하기위해 재단을 설립했다”며 “아직은 초기단계이지만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지역 고려인들로부터 소액의 기부금이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모친이 러시아계인 최완일(58) 부회장은 “현재 김병화 농장에는 300가구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으며 강제이주 1세대인 60여명의 노인들이 아직도 생존해 있다”면서 “한국이 지난 60년간 잊고 살았던 고려인들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