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푸른 보리밭에서 본 라마유르 곰빠. 절벽 끝에 가까스로 매달려있는 듯하다. 나는 저 풍경을 보기 위해 그 먼 라다크를 찾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 할머니들은 카메라만 보면 얼굴을 가리며 몹시 수줍어했다. (아래)
- 푸른 보리밭과 절벽 위의 라마유르 곰빠

약 기운인지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었다. 아침바람이 차가워 두툼한 겨울재킷을 걸치고 털모자를 눌러쓴 채 게스트 하우스 뒷문으로 나가자 곧 마을우물이 나타났다. 아침 일찍 물 길러 온 사람들에게 곰빠 가는 길을 물으니 곧장 올라가면 곰빠란다. 정말 숙소에서 곰빠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을 만큼 가깝다. 길가에는 새벽일 나온 사람들과 이제 막 잠에서 깬 가축들과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난 어린 스님들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곰빠 안에는 노스님이 만트라를 외고 계셨는데 뒤쪽으로 나있는 문을 통해 들어가 여러 개의 마니차와 큰 스투파 앞에 서니 라마유르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기도 깃발 룽다와 파르초가 고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제 몸을 힘차게 흔들고 있다. 마을의 집들은 갓 태어나 어미 가슴을 빨고 있는 새끼 짐승처럼 사원에 붙어있는 형상이다. 이 오래된 사원 하나가 이 마을을 지켰으리라.
 
라마유르는 작고 아담한 마을이다.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 싸인 작은 분지에 마을이 있지만 이곳 라마유르의 고도도 해발 3천390m이니 라다크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고원에 위치한 마을인지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라마유르는 마을 가장 높은 바위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곰빠를 시작으로 아래에는 집들이 있고 까길과 레를 잇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엔 계단식 밭들이 있는데 그 밭만이 유일하게 평지인 셈이다. 지금은 푸른 밀밭이 몇 그루 키 멀쑥하게 자란 미루나무와 더불어 황량한 돌산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곰빠가 있는 마을을 중심으로 동쪽 레 방향에는 바위산이 주름 무늬를 가진 협곡을 이루고, 남쪽은 계곡을 따라 밭이 있고, 포추라 고개(4천147m)가 있는 서쪽 방향으론 지금은 폐교가 된 듯한 빈 학교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스투파(흰색으로 칠해진 불탑)들이 룽다와 함께 나란히 줄을 서서 고개를 넘어오는 여행자들을 환영해 주고 있다. 오전에 마을을 가로질러 스투파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따라 내려가니 서에서 동으로 흘러가는 그리 크지 않은 개울이다. 물을 보니 반가움에 발이라도 적셔볼까 하여 내려섰는데 그곳은 의외로 안온했고 뜻밖에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고원에서 맑은 개울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상큼한 일인지.
 
사람들은 이 고마운 물을 마을로 끌어들여 식수를 해결하고 농사를 지을 것이다. 계곡에서 보면 마을 전체가 언덕 위 푸른 밀밭에 묻히고 지나다니는 사람이라곤 눈 씻고 봐도 없는 그곳을 단지 손발만 담그고 지나칠 수는 없었다. 설령 멀리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슬쩍 훔쳐본다 해도 그리 동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옷을 벗고 물로 뛰어들었다. 물은 생각보다 차다. 그러나 쌀쌀한 저녁과 다르게 낮엔 살을 태울 듯한 뜨거운 햇살이 있으니 차가운 물이 염려될 리도 없고 바람도 산들산들 정겹기만 하다. 개울은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리면 겨우 등을 적실 정도의 깊이인데 물에 들어가 한기를 느낄 때쯤 수건을 펴고 엎드려 물기를 말리고 다시 등이 뜨거워지면 들어가기를 몇 번. 그렇게 고산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는 동안 하늘과 햇살과 바람이 내 안의 모든 경계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나는 계곡 바닥에 누워 두 팔을 벌린 채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저 먼 히말라야 아래 고원에서 옷을 벗는 것은 바람 같은 자유를 희구하는 신에게 바치는 나만의 제례의식이다. 알몸으로 쏟아지는 달디단 햇살은 원초적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함께 공차기할 아이들은 어디 가고
 
그리도 그리워했던 풍경, 먼지를 날리며 축구공을 실은 트럭이 언덕을 향해 오르고 공을 차던 곰빠의 어린 스님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리 마을을 둘러봐도 공을 찰만한 곳은 없다. 만일, 어느 광고에서처럼 정말 이곳에서 공을 찼다면 오직 저 푸른 밀밭뿐이다. 지금은 밀이 자라고 있지만 얼마 후 추수를 끝낸 빈 밭이라면 혹 이곳 아이들과 곰빠의 어린 스님들이 공을 찰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빈곤한 상상력에 불과했다.
 
저녁식사를 기다리고 있을 때, 늦게 도착한 히피족 청년이 다가와 테이블에 나란히 앉는다. 그는 인도여행을 시작한지 꽤 오래된 미국 청년으로 그간의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들려주었는데 내가 다음 코스를 이야기했더니 자신과는 반대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론리프랜(lonely planet), 노스 인디아(north India·미국, 영국, 호주, 프랑스에서 발행하는 여행가이드북)를 펼쳐 보이며 아름답고 신비한 벽화가 있는 알치마을의 알치곰빠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꼭 가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의 친절에 대한 답례로 나도 아직 그가 보지 못한 라마유르 곰빠는 내일 아침 어느 쪽에서 먼저 보는 게 좋고 뷰포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