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근간이 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지 13일로 85주년이 된다.

우리 역사상 최초로 주권재민과 삼권분립의 원칙을 선언한 민주공화정부로서 우리나라 헌정사의 출발점이 됐던 임정에 대한 역사와 업적이 너무나 무시돼 온 것이 사실이다.

머나먼 이국땅 중국 상하이에서 풍찬노숙하면서도 오로지 일제에 의해 빼앗겼던 국권을 되찾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편집자 주>


3·1운동이후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제국주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1919년 4월13일에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조국 광복을 위한 우리 나라의 임시 정부로 1945년까지 존속했다.

수립일 보다 이틀 앞선 1919년 4월11일 이동녕(李東寧) 의장을 비롯한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해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게 된다.

▲임시정부의 조직

3·1 운동을 계기로 민주 공화 정부를 세워야 세계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고 민족의 지도자 수십명이 국제 도시인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를 세우기로 약속했다.

임시 의정원의 의장에는 이동녕이 피선됐고, 국무원 각료에는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차장·신익희), 외무총장 김규식(차장·현 순), 재무총장 최재형(차장·이춘숙), 교통총장 신석우(차장·선우혁), 군무총장 이동휘(차장·조성환), 법무총장 이시영(차장·남형우) 등이 각각 임명됐다.

원칙적으로 임시 정부는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 형태의 민주 공화 정부임을 분명히 밝히는 한편, 이후 1945년 8·15 광복까지 상하이(1919), 항저우(杭州·1932), 전장(鎭江·1935), 창사(長沙·1937), 광둥(廣東·1938), 류저우(柳州·1938), 치장(1939), 충칭(重慶·1940) 등지로 청사를 옮기며 광복운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의 활동

1 교통·정보통신망 구축=임시정부는 임시 정부와 국내 각지를 비밀리에 연결하고 국내외 동포를 모두 관할하는 연락기관인 교통국을 설치하는 한편,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실시했다.

교통부 내에는 지부를 설치하고 전국 각 군에 교통국을, 면에 교통소를 신설했으며 군자금 모집, 국내 정보수집, 정부문서 국내 전달, 인물발굴 및 무기수송 등의 활동을 했다.

업무는 법령 및 공문의 전포, 군인 모집, 시위운동 계획, 애국성금 갹출운동 등 다양했다.

2 독립 자금 확보=독립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와 해외 여러 곳에 사람을 보내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구급의연금과 인두세를 걷고 국내외 공채를 발행했으나 이 중 아일랜드에서 발행한 500만 달러의 공채만 성공했다.

3 역사 의식 고취=일본의 침략사실과 한국역사의 우수성을 설명하기 위해 1921년 7월 사료편찬부를 설치,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여 세계 자유 국민 앞에 보여줌으로써 일본이 우리 나라를 불법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호소했다. 또한 1921년 9월말 전 4권의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를 완성하는 한편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했다.

4 외교활동=초기의 외교 활동은 대미외교에 중점을 두었고, 종전기에는 대중외교가 주류를 이루었다.

1919년 4월18일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였고, 7월에는 스위스에서 열리는 만국사회당대회(萬國社會黨大會)에 조소앙을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28년까지 유럽과 미주의 외교업무를 맡은 구미위원부는 미국 국회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키고 1921년 워싱턴에서 개막된 태평양회의에서 한국국민의 상황을 세계여론에 알렸다.

5 군사활동=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단체지원, 광복군창설 등의 군사활동으로 이루어진다.

1932년 1월8일 이봉창의 도쿄의거는 실패했지만 4월29일 윤봉길의 상하이의거는 일본군 사령관 등 20여명을 살상하는 성과를 올려 한국독립에 대한 여론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으며 아울러 임시정부는 일제의 보복을 피해 여러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군사활동으로는 1920년 상하이에 육군 무관학교, 비행사양성소, 간호학교 등을 세워 군사를 양성하는 한편 중국 군관학교에 군인을 파견하여 교육시키고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후원했다.

1944년에는 중국과 새로운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권을 얻었고 1945년에는 국내진입작전의 일환으로 국내정진군 총지휘부를 설립하고 미군의 OSS부대와 합동작전으로 국내에 진입하려는 계획을 진행하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임시정부 수립의 의의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이하자 주요 간부들은 개인 자격으로 속속 귀국했지만, 국내의 혼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과 정책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지도이념인 자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