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구 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특히 지하자원이 풍부한 카자흐스탄과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던 우즈베키스탄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원동(遠東·연해주를 비롯한 극동아시아)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민족적 굴욕을 이겨내고 중앙아시아의 주요 민족으로 성장, 뜨거운 동포애를 느끼게 하는 곳이다.
 
하지만 70년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민족 문화의 근간인 말과 글은 많이 잊혀진 상태다. 현지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과정이기도 했다.
 
최근들어 경제교류가 늘면서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카자흐스탄에 한국어 문법책을 지원하고 있는 경기문화재단(대표이사·송태호) 관계자와 기자 등 7명의 방문단이 한국어 교재 지원과 문화교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지난 14일부터 21일까지 8일간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와 크즐로르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고려인들을 탐방했다. 한국어 교육을 포함한 문화교류 현황과 전망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고려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이산)'로 불리는 18만 한인의 강제이주는 지금도 고려인들의 가슴에 한(恨)과 굴욕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한민족 특유의 근면과 끈기, 높은 교육열 그리고 타 민족과 문화에 개방적인 현지인의 도움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사회 각계각층에 진출해 주목받는 민족으로 성장했다. 현재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40만여명으로 추산된다. 그중 10만여명이 카자흐스탄(이하 카자흐)에, 17만여명이 우즈베키스탄(이하 우즈베크)에 거주하고 있다.
 
고향에서 6천여㎞나 멀어져 버린 고려인들이, 돌아갈 가능성마저 희박해진 상황에서 어떻게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60여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
 
우리 말과 글을 민족얼을 지키는 보루로서의 결정적 역할을 한 '고려일보'와 '고려극장'이 디아스포라에 동반한 데서 그 답의 핵심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은 알마티에 있는 고려일보(사장·최영근)와 고려극장(극장장·이뤼보피·여)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설됐다. 고려일보는 1919년 '선봉(아방가르드)'이라는 제호로 창간했고, 고려극장은 이보다 늦은 1932년 개관했다. 강제이주와 더불어 고려일보는 1938년(이때 제호를 '선봉'에서 레닌의 깃발이라는 뜻의 '레닌기치'로 바꿨고 다시 1991년 '고려일보'로 바꿨다)에, 고려극장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옮겨와 우리 말과 글, 전통문화의 명맥을 잇는 버팀목 역할을 해왔다. 특히 이 두 기관은 '고려문학'으로 분류되는 문학적 흐름과 고려인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고려일보는 우리 글로 소식을 전하는 데 그친 게 아니다. 지식인과 문인들이 지면을 통해 비평활동을 하고, 시와 소설을 연재했다. 연재된 글은 책으로 엮어졌고, 소설은 각색돼 고려극장 무대에 올려졌다. 구소련에서 독립한 뒤 창간된 우즈베크의 고려신문, 러시아 모스크바의 아리랑신문, 사할린의 새고려신문이 모두 고려일보를 모태로 하고 있다.
 
알마티 고려인 사회의 원로 정상진(87)옹은 연해주 태생으로 크즐로르다 대학을 졸업하고 1941년부터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구 소련이 김일성 체제 구축을 도우라며 북한에 파견, 1950년대 북에서 문화부 부상(차관 격), 김일성대 세계문학학부 교수 등을 역임했다는 그는 “홍명희 임화 이기영 최승희-안막 부부 등 남한 출신 예술인과 친하게 지냈는데 김일성이 이들을 비호한다며 '반당분자'로 몰아 숙청해 1957년 소련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북한체험기를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라는 제목으로 고려일보에 연재하고 있는데, “북한에는 위대한 작가들에 대해 비평하고 기록을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정옹과 절친한 정추(82)박사 역시 고려일보를 통해 꾸준히 음악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남한 태생으로 일본 유학에 이어 구 소련 차이코프스키음악원에서 클래식음악(작곡)을 전공한 그는 고려인의 민요를 채록,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일성 1인 독재가 싫어 망명했다”는 그는 기자에게 흥미로운 사실을 전했다. 근래 한국에선 홍난파 선생의 친일행적이 밝혀져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전언을 듣고 정 박사는 “일제때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된 조선 청년들이 용산역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울면서 노래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봉선화'는 온 백성을 이어준 단 하나의 노래였다”고 회상했다.
 
고려인은 크게 3가지 부류로 구성돼 있다. 주류는 물론 강제이주민의 후손이다. 두 번째 부류는 1950년대 북한 정부의 유학생으로 모스크바에 왔다가 정치망명한 사람들이고 마지막은 2차대전 이후 사할린에 남았다가 중앙아시아로 다시 강제이주된 사람들이다. 그중 두 번째 부류는 김일성독재에 저항한 지식층이 대부분으로, 소련 땅에서 동포를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