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이하 카자흐) 최대도시 알마티에서 서북쪽으로 1천200여㎞ 떨어진 크즐로르다(Kyzylorda)는 6월에 이미 40℃를 웃도는 기후에 밤 10시나 돼야 해가 지는 척박한 땅이다. 1937년 초겨울 9만7천여명의 고려인이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공포 속에서 크즐로르다 집단농장에 도착했다. 그후 60여년, 고려인은 이 지역을 기반으로 재기했고 우수 민족으로서 지역 발전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고려인들이 다시 일어선 곳
 
크즐로르다는 강제이주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 명실상부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문화·교육의 중심지였다.
 
우선 고려극장과 고려일보가 여기서 부활했다. 고려극장의 전신인 조선극장은 강제이주 당시 한 그룹이 크즐로르다로 흘러들었고 1959년부터 1968년까지 여기서 활동했다.
 
현재 크즐로르다 시내 중심지에는 고려인들이 손수 벽돌을 날라 지었다는 전 고려극장이 웅장한 자태로 서있고 크즐로르다 고려인협회(회장·오가이 에두아르드·58)가 입주해 있다. 성이 '오가'라는 말이 이름이 돼버린 오가이 회장은 “고려인은 현재 8천989명(전체인구 23만여명)으로 줄어들었지만 여기서 세 번째 민족이며 부지사 부인도 고려인”이라고 소개했다.
 
강제이주 때 폐간됐던 고려일보 역시 1938년 크즐로르다에서 '레닌의 기치'로 복간돼 전성기를 보낸 뒤 1979년 알마티로 옮겨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한 크즐로르다국립대학교(Kyzylorda State University)가 원동 고려사범대학을 모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인들은 생활이 안정되자마자 모국어와 풍속을 지키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고려사범대학을 계승한 학교를 연다. 학교는 소련의 민족동화정책 때문에 1년이 안돼 러시아어를 사용해야 했으나 고려인 교육의 핵심 기관이 됐고 국립대학교로 발전했다. 대학 당국은 지난 92년 한국어학과를 개설해 한국어 통·번역, 한국학 등을 교육하고 있다.
 
이 곳에는 또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1868~1943), 사학자이자 국어학자인 계봉우(1879~1959) 선생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두 사람 모두 강제이주돼 이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난 93년 발족한 홍범도재단의 김레브 회장은 “홍범도 장군은 고려극장 수위 등을 하면서 홀로 외로이 일생을 마쳤다”면서 “당시에는 그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인지 몰랐고 그도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 크즐로르다국립대학교-경기문화재단 문화교류 협약 체결
 
지난 6월17일 크즐로르다국립대학교 회의실에서는 고려인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이 대학 부총장 3명을 비롯한 교직원 등 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한국어 보급과 한국문화 보전에 관한 세미나'에 이어 경기문화재단이 지원·제작한 '한국어구문책자'(김필영 저) 1천권과 '고려문학선집' 500권 전달식 그리고 '양자간 문화교류 협력에 관한 양해각서(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체결이 이어졌다.
 
세미나에서는 경기문화재단 송태호 대표이사와 크즐로르다대(大) 티무르 켄싱바이 부총장, 김필영 교수, 홍범도재단의 김 회장, 계봉우재단의 계학림 회장 등이 발표했다. 송 대표이사는 “우리 민족이 어려웠던 시기에 따뜻하게 도와준 카자흐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해 “4년 전부터 한국어 교재를 지원하고 있는 데는 감사의 의미와 함께 양국 번영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문학을 포함한 다방면의 문화교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켄싱바이 부총장은 한국어 교재와 교사의 부족을 지적하고 “최근 한국어학과 학생수가 줄어들고 있어 한국어경연대회를 계획하고 있으며 대학 내 '중앙아시아 한국학연구소'를 개소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세미나를 마치고 재단측과 문화교류 양해각서에 사인을 한 클뤼슈바이 비세노프 총장은 “고려인들은 우리 지역의 농업과 문화, 교육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한국측과 지속적인 문화교류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인터뷰] 계봉우재단 대표 계학림옹

“현재 고려인 중 3~5%만이 민족말을 이해하고 구사합니다. 그것도 짧은 말밖에는 못해요. 카자흐는 여러 민족이 공존하면서 영향을 주고받는 다민족국가인데 그 안에서 민족문화를 지키는 것은 어렵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낮고 단호한 음성에 의연한 기품이 느껴지는 외모의 계학림(79)옹은 민족교육자 계봉우(1879~1959)선생의 4남1녀 중 막내다. 함북 영흥 태생의 계봉우는 1919년 3·1운동 직후 연해주로 망명, 우리 역사와 언어 등 국학연구와 민족주의교육에 헌신했다. 1937년 크즐로르다로 강제이주된 뒤 '조선문법 1·2' '조선문학사 1·2' '의병전'과 자전적 산문집 '꿈 속의 꿈' 등 총 34권에 달하는 국어학·국문학·역사학·사회경제학 분야 저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