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천여년의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 교토. 일본 내 어느 곳보다도 민족주의가 강한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토에서의 항일운동이 가능이나 했을까라는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 정부는 정책적으로 자국과 한반도 4곳에 제국대학을 세운다. 동경제대, 교토제대, 규슈제대 그리고 경성제대(서울대 전신)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동경제대(현 도쿄대)는 정부 관료를 주로 배출하는 곳이었다. 반면 교토제대는 사회주의 사상가나 철학가들이 많이 배출됐다. 이는 민족주의 성격이 강하고 일본인으로서 '프라이드'가 강한 지역적 성향이 반영된 것이다.
 
민족주의가 뿌리깊었던 토양때문일까? 대립각을 세울 수 밖에 없었던 항일운동도 민족주의 색채를 물씬 띠었다. 교토에서의 민족운동, 대중운동은 그래서 사회주의 성격이 강했다. 상당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사상적 배경을 완성한뒤 만주나 북간도로 진출, 활발한 항일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탓인지 지금도 재일동포 교육이 가장 잘 되고 있는 곳이 바로 교토다. 일본 전체에 민단학교가 4곳이 있지만 그중 2곳이 바로 이 교토에 있을 정도니 말이다.

◇항일과 문학이 하나로
 
송몽규는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던 사람으로 알려졌다. 한마디로 리더로서의 자질이 뛰어났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몽규의 외사촌 동생이 바로 윤동주다. 송몽규가 윤동주에 비해 석달 앞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함께 공부했고 교토에도 함께 건너왔다. 유학생 단체도 함께 만들어 독립운동을 벌였고 경찰에 잡힌뒤 불과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숨졌다. 사촌이기 전에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였다.
 
우리 항일 역사나 문학사에서 윤동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지 않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때문에 윤동주의 삶을 이해하려면 사촌형 송몽규를 알아야 한다.
 
1917년 만주 간도에서 태어난 송몽규는 1935년 만주 은진중학교를 거쳐 중국 남경에서 김구가 세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학해 군사훈련교육을 받는다. 수차례의 독립활동과 투옥생활을 거친뒤 간도에서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윤동주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이 우리 고유의 문화와 한민족을 말살시킨다며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윤동주 등과 함께 교내에서 다양한 문학활동을 펼치며 민족의식을 높였다.
 
1942년 4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한다. 민족의식을 높이기 위한 그의 학문적 활동과 항일운동은 이때 활발히 펼쳐진다.
 
송몽규는 윤동주 그리고 교토 제3고등학교생 고희욱 등과 함께 1942년 10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이른바 '교토 조선학생 민족주의 그룹'을 결성한다. '교토 조선학생 민족주의 그룹'은 조선독립 여론을 조성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문화적인 방법등을 통해 계몽함으로써 민중 봉기를 이끌어낸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그러나 이같은 꿈을 채 피워보기도 전에 경찰에 체포돼 1944년 경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는다. 그러던중 해방을 눈앞에 둔 1945년 3월 7일 옥사했다.

◇항일의 씨앗을 품다
 
대표적인 항일투쟁의 주인공인 이봉창 의사가 평범한 노동자에서 조국의 독립을 갈구하는 의사로 다시 태어난 것도 바로 이곳 교토다.
 
3·1운동 직후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국내 노동자들이 많이 머물던 오사카 등지에서 직공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1928년 11월 교토의 어소(일왕의 숙소)에서 있었던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보기 위해 찾아가다가 일본 경찰의 검문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이봉창 의사의 옷 주머니 속에 한글편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서에 무려 11일동안 구금시켰다. 이 일은 청년 노동자 이봉창의 의식을 바꿨고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는 계기가 됐다. 이봉창 의사는 2년여 뒤인 1931년 1월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서 김구를 만났다.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해 상해에 왔다”는 이봉창 의사의 고백은 바로 이 자리에서 나왔다. 교토 어소에서 이봉창 의사가 가졌을 분노의 깊이를 헤아릴수 있는 대목이다.

 주관: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 보훈교육연구원
 후원: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