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인천 10대 부호 중 한 사람이었던 '이흥선(李興善·1877~1975년)'의 발자취를 찾기란 결코 녹록지 않은 일이다.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용히 일을 도모했던 겸양의 성품이 한 가지 이유이고, 후손들도 이미 작고했거나 뿔뿔이 흩어져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이 또 다른 이유다.
이흥선은 일본제국주의가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며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우리나라를 극도로 착취하던 1938년 7월14일, 인천의 유지들과 힘을 모아 인천 최초의 민족사학인 '인천상업강습회'를 개교시킨 주인공이다.
창씨개명, 조선어교육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때 청소년들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을 교육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지금의 동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민족학교를 연 것이다.
중구 율목동 239에 둥지를 튼 인천상업강습회는 이듬해 4월1일 인천상업전수학교로 개편하고 학생 120명, 교사 3명으로 개교식을 갖고 교육을 시작했다.
이흥선을 비롯 김윤복, 유군성, 김세완, 김종섭 등 당시 인천에서 내로라하는 부호들은 각기 사재를 털어 인천상업전수학교 설립에 밀알을 뿌렸다.
66년의 세월동안 인천상업강습회→인천상업전수학교→동산중→동산고로 발전하면서 인재를 길러 온 학교법인 동산육영회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인천시사 인물편에는 이흥선이 '김포' 출생으로 기록돼 있지만 사실은 '황해도'라고 한다.
인천시사 편찬위원회 김양수(71) 상임위원에 따르면 이흥선의 가족이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포로 이주했고 9살 소년이 된 이흥선은 입에 풀칠할 요량으로 혈혈단신 인천에 올라 왔다.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미두(米豆)거래소 사환으로 취직한 그는 19살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이 곳에서 10년간을 열심히 일했다.
결혼을 위해 회사를 그만 두려 하자 미두거래소 일본인 사장은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돈 1천환(10억원 상당)을 퇴직금으로 지급했다.
이흥선은 이 돈을 밑천삼아 1918년 중구 유동에 인흥정미소를 차렸고 탁월한 경영실력으로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고 한다.
1936년엔 석유와 곡물업을 겸한 인흥상사를 차려 인천의 10대 부호 반열에 올랐다.
일본인과 합작해 지금의 동인천역 앞 용동에 당시로선 최첨단인 단층건물의 '인영극장'을 건립, 공연사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 부를 얻은 그의 가슴 속에는 늘 '배움에의 목마름'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학교 부실운영을 명분으로 민족사학을 하나 둘 폐교시키는데 혈안이 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교육정책에 맞서 민족자존을 지켜 낼 미래인재를 육성해야겠다는 결심도 이 때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인천경제계 유지들과 뜻을 모은 이흥선은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헌납해 인천상업강습회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육영사업에 대한 그의 강한 의욕은 훗날 학교법인 동산육영회 이사장으로 취임하던 1973년 4월21일 발표한 글에서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습니다. 인류가 지구 상에 존재했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배움의 길을 부단히 걸어 왔습니다. 그리고도 아직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일본이 요즈음 경제대국이 되어 세계 강국으로 군림하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문화의 근간은 모두 우리 민족이 전해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오늘은 왜 세계 강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국제정세의 흐름에 당황해야만 하는 슬픈 위치에 머물러 있게 된 것일까요? 배움이 약했기 때문입니다.
배움에 대한 사명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배움의 길을 걷는데 있어 배움, 그것과 민족에 대한 사명감없이 우왕좌왕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절대로 되지 맙시다.”
이흥선의 민족교육애를 확인할 수 있는 새로운 일화도 밝혀졌다.
일제시대 당시 영화여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갔다가 공부를 중도포기하고 귀국한 인천여성 박창례가 있었다.
박창례는 못배운 한이 쌓였다고 한다. 박창례는 1040년께 인천에 산재해 있던 선미공장(정미공장에서 키로 곡식을 고르는 작업을 하는 공장), 동양방직, 성냥공장 등에서 일하던 여공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유동 보각선원에 야학을 개설했다. 그러나 한글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일본경찰로부터 갖은 폐쇄협박을 받아야 했다.
어려운 처지를 알게 된 이흥선은 선뜻 자신이 경영하던 유동 인흥정미소 창고를 야학 공간으로 무상임대해 주고 일본경찰의 탄압으로부터 적극 보호해 줬다. 결국 박창례는 이흥선의 정미소 창고에 '동명학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여공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교육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일본경찰의 강압으로 나중에 '소화학원'으로 교명이 바뀌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의 인천동명초교로 발전하는 모태가 됐다. 인천의 10대 부호 중 한 명이었고 어렵게 모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민족사학을 설립하는데 이바지한 이흥선이었지만 그는 유벌나게도 전면에 나서길 꺼렸다.
수십년의 풍상 속에서 학교법인 동산육영회 설립과 발전에 끊임없이 동참하고 관여한 그였지만 설립동료들이 모두 타계하고 그 자신도 90대 노객이 된 1973년에야 떠맡다시피 법인 이사장직에 취임했다. 마지막 인생의 투혼을 자신의 혼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동산육영화에 쏟은 이흥선은 1975년 6월 10일 내동 자택에서 조용히 서거했다. 우리나라 고고학의 대가인 고유섭 선생의 부인이었던 맏딸 그리고 경기은행 설립멤버로 상무이사를 역임한 영래씨가 차남이다.
이흥선의 종손자로 프로야구 삼미슈퍼스타즈 코치를 지낸 이춘근(58·동산고 15회)씨는 "할아버지는 평소 과묵하고 엄한 성품이어서 감히 누구도 함부로 말을 건네지 못할만큼 위엄이 넘치는 분이었다"고 전했다. 인천상공회의소 100년사 편찬을 주도했던 오종원(75·전 인천일보 편집국장)씨는 "이흥선은 근대 인천의 경제와 교육을 부흥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라며 "인천사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그 분의 행적과 이력에 대해 보다 자세한 사료취합과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향토사학계 일각에서는 일제시대 식민지 식량수탈의 창구였던 정미소를 통해 부를 축적한 측면 등 비판적 관점에서 연구할 부분도 적지 않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인터뷰/ 김양수 인천시사편찬 상임위원
"인천시사 인물편에 '이흥선'이란 인물을 수록하면서도 그 분의 자세한 이력과 행적을 담지 못해 여지껏 아쉬움 속에서 지냈는데 인흥정미소와 자택 터를 찾게 돼 그나마 위안이 되는군요." 노환으로 불편한 몸을 이글고 지난 12일 이흥선 발자취 더듬기에 동행한 김양수(71·사진)씨는 남다른 감회를 보였다.
젊은 시절 언론인, 문학평론가 등을 거쳐 지금도 인천 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인천시 문화재위원 등을 맡고 있는 그는 어린시절 아련하게 떠오른 기억을 더듬어가며 중구 율목동, 유동, 내동, 신포동 일원을 훑기 시작했다.
이흥선 정미소로도 불렸던 인흥정미소 터는 이미 흔적 조차 사라진지 오래지만 유동 11 버드나무3길에서 찾아냈다. 1940년 이흥선이 박창례에게 야학 동명학원 교무실로 무상임대해 줬던 인흥정미소 창고는 세월의 풍상 속에서도 붉은 벽돌 형체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곳 토박이 김태원(66)씨가 30여년 전 매입해 거주하고 있었다.
이흥선이 건립한 신식 영화관이었던 동인천역 맞은편 용동 인영극장은 지금은 높다란 은행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널따란 기와집 10여채가 몰려 있어 이흥선이 서거할 때까지 살았던 내동 부촌(답동성당 맞은 편 신포시장 초입)은 지금은 화려한 네온사인이 빛나는 의류매장건물로 변해 있었다.
김씨는 "이흥선의 집은 유년시절 우리 집(용동)과 가까운 내동에 위치해 있었고 이흥선의 맏딸(약 15년 전 작고)과 친했던 친척 누님을 따라 자주 이흥선 집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흥선의 이력과 행적을 추적하려 애썼지만 그분 자신이 워낙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길 싫어하는 성품인데다 차남 영래(2001년 작고)씨도 풍부한 자료를 내놓지 않아 인천의 거목을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고 말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세월이 더 흐르기 전에 인천경제의 거목이자 육영사업에 헌신한 이흥선 연구가 시와 향토사학계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뤄졌으면 한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윤관옥기자·okyun@kyeongin.com>윤관옥기자·okyu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