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집이 설립을 주도한 '인천항신상협회'의 상상도.


   '민족자본을 결집한 상업적 선각자에서 친일까지'.

   개항기 인천의 대표적인 부호였던 서상집(徐相集·1853~?)의 삶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도덕사관'에 입각해 그의 삶을 조명할 때 그의 친일행적은 분명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도덕성'을 배제할 경우, 역사 학자들 사이에서 그의 삶은 개항기의 인천을 이해하는 '키 워드'로 인식되고 있다.
 
   더욱이 한·청·일 등 삼국 상인이 각축전을 벌일때 한국상인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많은 학자들이 공감하는 바이다. 이 때문인지 몇몇 기록에서 서상집은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인천시 중구 홈페이지 향토자료실에서는 서상집에 대해 “인천부사겸 감리를 지내고 인천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 1897년에 신상회사를 발기하고 인천의 물산 객주 50여명을 단결하여 조선인사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는 서상집이 인천상공회의소의 전신으로 민족자본의 결집체인 '인천항신상협회'(仁川港紳商協會)의 설립을 주도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상인 출신으로 지금의 경제특구청장 또는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인천항 감리를 지낸 그의 입지전적 삶도 이러한 긍정적인 평가의 단초를 제공하는 데 일정부분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서상집이 활동할 시기의 인천은 개항과 더불어 국내외에서 많은 상인들이 모여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때였다. 이에 따라 민족상인들도 외국상인들에 대항하기 위해 객주(客主)들을 주축으로 1885년 '인천객주회'(仁川客主會)를 조직했다. 그러나 '인천객주회'는 조직이나 기능면에서 근대적인 상인단체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서상집이 인천에서 최초로 양옥집을 지은것으로 추정되는 지역.


   이때 제대로 구색을 갖추고 등장한 게 우리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인 '인천항신상협회'다. '인천상공회의소 100년사'에 따르면 인천객주회를 모체로 1896년에 인천항신상협회가 출범했는데 인천항의 객주 서상집 등이 주동이 돼 서상빈, 박명규 등의 진신(縉紳·벼슬아치)과 민상(民商) 등이 설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처음 회원은 50명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객주들이었으나 적지 않은 명망가들도 포함돼 있었다.
 
   '인천상공회의소 100년사'는 서상집에 대해 “인천항신상협회 창립을 주도했던 서상집은 대구출신(인천시 중구청 자료에는 서상집의 출신지가 중구 내동으로 기록돼 있음)이었음에도 인천항감리서의 감리직에 있었고 또 전환국의 지사를 지낸바도 있어 경제문제에 깊은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인천항신상협회'는 외국상인, 특히 일본상인들의 상권침탈에 대항해 민족상권을 옹호하는 한편 민족계 상인들의 상업자세의 혁신을 촉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때로는 일본상인들의 비위행위를 규탄했고 일본상인들의 상권침탈을 정부에 호소해 시정을 촉구하고 상업정보를 수집해 민족계 상인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김윤희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의 논문 '개항기 인천유통네트워크와 한상의 성장조건'을 통해 “인천-상해, 인천-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인천 유통네트워크의 작동으로 다양한 수입상품이 유입되었던 인천항은 경인지역과 평양, 군산, 목포 등지에 수입상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인천-서울간 무역에서 한국산 취급은 대부분 한상이 장악하고 있었다”고 개항기 인천의 분위기를 소개했다. 여기에는 인천항신상협회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상집은 또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은행인 대한천일은행(상업은행 전신) 인천지점의 지배인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 본점으로부터 영업점 표창장과 포상금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인천의 재발견-일본제일국립은행에서 대한천일은행까지).
 
   그러나 서상집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여기까지다.
 
   그는 40대에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친일행적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서상집의 친일행적은 기록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인천부사'에 따르면 서상집은 자신의 토지 5천630평을 일본거류지에 기부하기도 했다.
 
  
▲서상집의 호적대장
국내 처음으로 서상집의 호적대장을 발췌, '한국근대상업도시연구'(국학자료원, 1998)를 펴낸 오성 세종대 교수는 “서상집은 인천의 거상(巨商), 부상(富商), 호상(豪商)으로 불릴만큼 인천항의 상업계를 대표할 만한 상인으로 선박을 이용한 해운이나 무역사업에도 손을 댔다”며 “그가 45세였던 1989년 당시 호적표에 나오는 그의 가옥은 기와집이 56칸, 초가 6칸 등 모두 74칸의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왕족을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규모의 저택이었다. 그는 토지도 많이 보유해 당시 인천에선 “웬만한 땅은 서상집의 땅”이란 말이 회자됐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부를 가늠케하는 또하나의 기록은 흥미를 더해준다.
 
   '개항과 양관역정'(최성연 저)에 따르면 서상집의 자녀는 '언제나 뉴우·스타일의 양복을 쪽쪽 빼고 다녔으며 신기한 소지품이 많았고 또 멋진 오토바이를 몰고 으스대던 모던·뽀이'였다. 서상집은 특히 배다리 십자로에서 율목동으로 뚫린 행길 초입에 인천에서 최초로 2층 벽돌 양옥집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 서상집의 행적 중에 눈길을 끄는 부분중의 하나가 개화 운동가 '유길준'과의 관계다. 오성 교수에 따르면 서상집은 당시 외무참의(外務參議)였던 유길준과 가까운 사이로 지내 1894년 발족한 군국기무처의 회의원까지 됐다가 1902년 유길준이 일본 망명 당시, 황제를 시해하고 의친왕을 옹립, 망명자 중심의 신정부를 수립하려 했던 유길준의 계획을 밀고했다.

   서상집은 같은해 인천항의 감리로 임명돼 40여일간 재직했는데 유길준의 계획을 밀고한 포상으로 추측된다. 서상집의 사망과 관련한 정확한 기록은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그의 아들 등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상하이, 톈진 등지에서 살았는데 해방이 되자 친일파의 혐의를 받고 독립군의 손에 일가 몰살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개항과 양관역정).

   ◇인터뷰/ 인천학연구원 김창수 박사

   개항기의 인천을 조명하기 위해 몇몇 학자들이 서상집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의 상임연구위원인 김창수(46)박사가 그 중 한 사람. 김 박사는 "서상집은 인천을 움직였던 사람 중 하나로 서상집이나 객주에 대한 연구는 인천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뿌리 중 하나"라고 말했다. 김박사는 이어 "서상집은 공과를 떠나 한·청·일 삼국상인이 각축전을 벌일 때 한상이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 인물로 어찌보면 중국에서 유통노하우, 근대식 비즈니스를 체득한 상업적 선각자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상집을 연구하면 개항장의 경제가 거의 드러날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 김 박사는 또 "군국기무처의 일원이었던 점, 유길준의 개혁에 깊이 관여하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개인의 치부를 위해 변절하는 과정은 군국기무처의 형성배경, 더 나아가 한국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며 서상집 인물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천에서 서상집에 대한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불과하다는 게 김 박사의 고백. "인천항 감리까지 지낸 중요한 인물인데도 인물 사진 하나 없고, 인천시사 인물편에 기재되지 않을 정도로 서상집에 대한 연구는 일천한 수준입니다. 더욱이 현존하는 몇몇 기록들도 일본인의 관점에서 기록돼 있을 뿐 아니라 체계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관리하는 부분도 미흡한 실정입니다."

   김박사는 이에 따라 "내년부터는 개항기의 객주연구, 인천의 상업사 연구를 연구사업 특수과제로 정해 본격적으로 연구에 뛰어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의 연구가 과거의 인천을 재조명하고 더 나아가 경제자유구역 인천의 미래에 이정표를 제시하기를 기대해 본다.

<임성훈기자·ho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