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59주년을 맞은 지난 8월15일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에선 뜻 깊은 행사가 열렸다. '친일파 청산'을둘러싼 정치권의 뜨거운 공방 속에서 열린 '황어 장터 3·1만세 운동 기념관' 준공식이 바로 그 것. 애국 지사 심혁성(沈爀誠·1888~1958)은 이 3·1 만세 운동의 중심에 있었다.
1919년 3월24일 오후 2시. 경기도 부천군 계양면 황어장터(장리기시장)에선 주민 600여명이 일제히 품에서 태극기를 꺼내 들고 목이 터져라 '조선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곳은 소가 주로 거래되는 우(牛)시장으로 매월 5일(음력) 장날에는 1천여명의 인파가 모였다.
일제는 전국 각지에서 3·1독립 운동이 일어난 터라 경계를 강화해 만세 운동 발생 3시간만인 오후 5시께 거사를 주도한 오류리 주민 심혁성을 체포했다. 그러나 주민 수백명은 '심혁성을 내놓아라'고 외치며 일본 순사 4명을 포위하고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거세게 저항했다.
이에 순사들은 칼을 빼들고 군중을 향해 휘둘렀다. 대열의 선두에 섰던 이은선(李殷先)은 칼에 맞아 살해되고 주민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순사들은 이 틈을 타 심혁성을 부평 주재소로 연행했다.
계양면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이날 밤 친일파로 지목되는 면서기의 집을 부수고, 당시 일제침략의 말단기구였던 계양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이때 주민들은 일제의 조선지배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임학, 용종, 병방, 박촌리의 민적부와 과세호수대장 등 면사무소내 주요 서류를 불태웠다.
계양주민들은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들이 대부분 구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인 3월25일에도 300여명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힘차게 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공포를 발사하며 제지해 가까스로 주민들을 강제 해산시킬 수 있었다.
'황어장터 3·1만세 운동 기념관'은 계양구가 지역의 역사적 전통성과 정체성을 확인하고, 주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해 19억원을 들여 건립했다. 인천에서 독립운동과 관련한 기념관이 세워진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수원대 사학과 박환(朴桓·46) 교수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된 대표적인 3·1운동”이라고 설명했다.
일제시대 독립 운동사를 전공한 박 교수는 “인천에서 벌어진 다른 소규모 만세운동과 비교해 볼때 가장 적극적이고 규모가 큰 항일투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지역 만세운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검토가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을 고증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증언 자료를 얻을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손자마저도 고령화되고 있어 인천지역 3·1운동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연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3·1 운동이 전개된 1919년 인천에서는 3월6일부터 만세 운동이 시작됐다. 3월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돌입하면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3월8일에는 인천 시내에 독립선언서가 다수 배포됐고, 특히 부두와 정미소 노동자들의 행동을 촉구하는 격문이 시내 곳곳에 붙었다. 다음 날인 3월9일에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모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면사무소를 파괴하는 등 본격적인 대규모 항일운동이었던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3월27일 문학동 시위, 3월28일 남동시위, 4월1일 월미도 등지의 만세운동에 밑거름이 됐다.
1919년 3월27일자 '매일신보'는 황어장터 만세운동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천경찰서 관내의 경계선 되는 부천군도 불온의 형세가 있으므로 인천경찰서는 만일을 경비키 위해 23일 순사 3명을 부평주재소에 임시 응원으로 파견하였더라.… 그런데 24일 부평읍 밖 시장에서는 장날을 좋은 기회로 삼아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다수의 군중은 검거된 범인(심혁성)을 빼앗고자 돌을 경관에게 던지고, 경찰관에게 달려든 자도 있어서 경관 등은 발검하여 소요자편에 5~6명의 사상자를 내고 간신히 범인을 호송하여 주재소로 돌아왔다.…'
심혁성 지사를 비롯해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던 계양주민 40여명은 3·1운동을 전개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고, 일부 인사들은 김포 등 타 지역으로 피신했다.
만세운동의 중심인물들은 1919년 10월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상고했으나 11월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량이 최종 결정됐다. 심혁성 징역 8월, 이담 징역 2년, 임성춘 징역 1년, 최성옥 징역 10월, 전원순 징역 10월, 이공우 벌금 20원 등이었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 지사는 풍산(豊山) 심씨 문식(文植)씨의 큰 아들로 1888년 부천군 계양면 오류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주로 농업에 종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기록과 자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심혁성은 독실한 천도교인이었다.
3·1운동이 국내외 각지에서 발발하자 심혁성은 당시 부천군 계양면 지역의 천도교, 기독교 세력과 농민들을 규합해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로 인해 그는 보안법 위반 및 소요·훼방·직무집행방해죄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아 공소를 제기했으나 기각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심혁성 지사는 1921년 만기출옥한 뒤 서울에 잠입해 천도교인 장동호와 함께 암약했다. 1927년에는 함경도 안변군 위익면 청학리에서 임시거처하며 상해 임시정부와 두차례에 걸쳐 국내외 활동지시를 받고 활동했으며 1937년 이후에는 충남 공주, 강원도 영월 등지를 돌며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다.
심혁성 지사는 한평생 일제와 싸우며 피신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끔찍히 생각했고, 자신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다고 한다. 손자 며느리 권옥규(67)씨는 "처음 시집을 와서 진지를 올리는데 밥상에 세가지 반찬을 올렸다가 혼났다. 해방 후에도 밥상에 여러가지 반찬을 못올리게 했고 은수저도 못놓게 하셨다. 하지만 어려운 이웃에게 뭔가 나눠주고 베푸는데는 인색하지 않으셨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심혁성 지사는 1958년 12월 14일 인천시 북구 백석동에서 타계했다. 향년 70세.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인터뷰/ 심혁성지사 손자 심현조씨
"한겨울에 길에서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옷을 벗어주고 집에 오시는 날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의로운 일을 해도 '당연히 할 일이다'며 주위에 한번도 내색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심혁성 지사의 손자인 심현조(沈鉉祚·67)씨는 해방때까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강원도 등 산속에서 생활하던 어린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혁성 지사가 아들 홍기(鴻基·1990년 별세)씨와 함게 강원도 영월에 피신했던 1937년 태어난 심씨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강직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한번 옳은 일이라고 마음을 정하면 누구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일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다니다 보니 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했지만 그 덕분에 아버지와 저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씨는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에 가족이 모두 인천시 북구 백석동으로 이사를 오고, 아버지가 한약방을 열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동네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매일 아침 기도(천도교)를 드렸다고 했다.
심씨는 지난 1982년 심혁성 지사의 평생이력을 정리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냈고,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의 장손인 심씨가 한해 정부에서 받는 돈은 단 돈 20만원. 해마다 심혁성지사의 제사가 있는 12월에 제수비용으로 나오는 돈으로, 다른 연금은 없다고 했다.
심씨는 "요즘 젊은이들이 병역 기피로 물의를 빚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면서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결연히 목숨을 바쳤던 조상들의 모습을 우리가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민재기자·gustav@kyeongin.com>
신민재기자·gustav@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