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근·현대 화단에서 화미한 색채가 부여되는 미인도와 신선도를 포함한 인물화의 최고 대가(大家), 이당(以堂) 김은호(1892~1979년) 선생. 심전(心田) 안중식으로 부터 받은 아호 '이당'의 '이'(以)는 주역의 24괘중 첫 자를 딴 것으로 김은호는 아호처럼 모든 면에서 으뜸이었다.

   흔히 이당을 가리켜 북종화법의 전통을 기반으로 시대감각과 자신의 기법을 조화시킨 유일한 거봉(巨峯)으로 일컫는다. 그러나 이당의 그림세계에 대해 범이(凡以) 윤희순(尹喜淳·1902~1947)은 1942년에 이미 이렇게 쓰고 있다.
 
   “이당은 상(想)의 인(人)이 아니다. 기(技)의 인(人)이다. 기(技)에서 이루어진 품(品)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순수한 회화(繪畵)의 인(人)이다. …이당은 심전(心田)·소림(小琳·조석진) 이후의 기법인(技法人)으로 최고봉이다.” 이당의 예술경지가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승화된 품격임을 지적한 표현이다.
 
   이당은 87살이 되던 1979년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70여년 동안 예술혼을 불태워 제자 양성에 힘썼다. 국내 미술단체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이당 제자들의 모임 후소회(後素會·1937년) 참여 작가를 보면 그 면면을 알 수 있다. 후소회 창립멤버인 향당 백윤문, 월전 장우성, 운보 김기창, 규당 한유동, 현초 이유태, 취당 장덕, 심원 조중현 등 현대 미술계에 큰 영향을 준 작가들이다. 후소회는 그동안 회화전과 공모전 개최 등을 통해 한국 화단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13일 오후 인천시 부평구 산곡동의 화실에서 이당의 마지막 제자인 이정(以汀) 장주봉(56) 화백을 만났다. 이정은 “20세 되던 해 이당선생님을 처음 만났다”며 “당시 70세를 훌쩍 넘긴 선생님께서는 나를 보자 '내 그림을 따라 그리라'고 말하셨고 다른 문하생들에게 내 그림과 선생님 그림을 나란히 걸어놓고 '어떤 그림이 내 그림인지 맞춰보라'면서 묵묵히 나를 격려해줬다”고 회고했다.
 
   이당은 후진 양성에 있어서는 남달랐다. 품성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품행이 올바르지 못한 제자는 호통을 쳐 내쫓기 일쑤였다고 했다. '내 어머니는 개성의 유명한 기생이었다'고 무심결에 말했던 제자가 선생님께 크게 혼나고 쫓겨났다는 얘기는 제자들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다.
 
   이당은 유독 남자 제자들만 길러냈다. 여류 화가 숙당 배정례가 유일한 여제자다.
 
   후소회 관계자는 “한번은 선생님이 부산 최고 부잣집으로 부터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다니는 20대 딸을 제자로 받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허락했는데 1주일만에 되돌려 보냈다”고 말했다.
 
   다른 문하생들이 여 제자때문에 미술 공부를 소홀히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예술가 이전에 인간이 되라'는 이당의 교육철학은 오늘날에도 제자들이 가슴속에 남아있다.
 
  
▲최제우 인물화(1915년)
인천 남구 관교동에서 태어난 이당 선생은 구한말 인천관립일어학교(1906~1907년)을 다녔다. 일본 물결이 유입되는 세상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빨리 읽은 것이다. 17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부유했던 집안이 몰락하자, 인흥(仁興)학교 측량과를 마치고(1908) 서울로 옮겼다.
 
   그는 측량기사의 조수로 혹은 도장포와 인쇄소 등을 전전하다가 영풍서관에서 고서를 베끼는 일을 맡게 된다. 거기서 이당은 어려서부터 보여온 그림에 대한 능력을 인정받아 이왕가가 후원하는 근대적 화가 양성기관인 '서화미술회'에 제2기생으로 편입, 화과(畵科)와 서과(書科) 과정을 마친다(1912~1917년). 이곳에서 안중식과 조석진으로 부터 그림을 배워 '조선미술전람회'(선전)를 통해 이름을 날렸다. 이같은 출중함은 훗날 안중식으로 부터 이당이란 아호를 받게 된 계기가 된다.
 
   이당은 서화미술회에 입학하자마자 빼어난 묘사 솜씨로 친일세도가인 송병준의 초상화를 그린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순종 초상을 제작하는 어용화사(御用畵師)로 발탁된다(1915, 1928). 초상화로 유명해지자 당대의 상류층인 친일귀족, 자본가, 관료 등의 초상화를 맡게 되고, 그들과 교분이 두터워지면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는다. 이당이 친일파 화가로 전락하는 서막이다.
 
   일제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내용의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1937년)가 대표격이다. 1937년 8월 결성된 '애국금차회'의 일화를 담은 그림이나 애국금차회는 국방헌금 조달과 황군원호에 앞장 선 여성부인회였다. 이당은 그러나 서화미술회 졸업 후 민족미술에의 의지를 표방하며 결성된 '조선서화협회'(1918년 발족)전에 참여했고,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신문을 배포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정 장주봉 화백은 스승의 친일행적에 대해 “일제가 군국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만든 기록화는 모두 인물화였다”면서 “그런데 당시 인물화 분야에 뛰어난 사람은 선생님이셨다”고 시대적 배경이 가져온 아픔이라고 말했다.
 
  
▲승무(1940년 무렵)
이당은 전통적인 북종화의 명맥을 유지해 자신만의 독특한 채색기법을 완성했다. 이점은 오늘날 우리 미단에서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다. 이당은 안중식과 조석진으로 부터 남화(문인화)를 배웠다. 그러나 이당은 남화만 고집하지 않고 북화도 함께 그려 서양화법과 일본화법을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이당 선생은 "국가적으로 볼때 남화가 성(盛)하면 그림이 퇴보하고, 북화가 왕성할때만 미술이 크게 진보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채색위주의 북화를 소생시키려 하자 일본그림이라는 오해를 샀지만 먹으로만 그려도 북화가 있고, 채색으로만 그려도 남화가 있는 법이라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당이 87살로 생을 마감하던 그해 5월 제자들은 선생님의 치열한 예술혼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인천 중구 송학동 3가 5에 인천 이당기념관을 만들었다. 초대 관장을 맡은 이정 장주봉은 1989년까지 10년동안 이 기념관을 운영하며 후소회 소품전과 이당 회고전을 열기도 했다. 인천에 전시관이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이곳에서는 시낭송회나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렸다.

   경인일보가 기획한 초대작가전 1·2회도 이곳에서 개최됐다. 그러나 이당기념관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10년만에 문을 닫고 우리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당의 제자 모임인 후소회는 창립멤버였던 장우성과 김기창 양대 맥이 서울대, 홍익대, 수도여사대 등으로 직결되고 이유태, 안동숙, 김화경의 계보가 이화여대와 수도여사대로 이어져 명실상부 우리 동양화단의 커다란 줄기를 이뤘다.

   ◇인터뷰/ 이당의 마지막 제자 '이정' 장주봉 화백

   "선생님은 말년에 고향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셨어요. 돌아가시기 4년전에 인천에 함께 내려와 집을 알아보다가 문학산 밑에 땅 1만여평을 갖고 계신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20살이 되던 해 칠순을 훌쩍 넘긴 이당의 마지막 제자로 가르침을 받은 이정 장주봉 화백은 말년의 스승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컸다고 회상했다.

   "중구 송학동에 2층 집을 사 두었는데 그만 고향 땅도 밟아보시지 못하고 돌아가셨지요. 그 때문에 그 집을 이당 기념관으로 운영하게 된 겁니다. 인천이 경기도였던 시절인데 그 당시 경기도는 생가보존사업 대상 1순위로 이당선생님을 꼽았고 홍난파, 나혜석, 박세림 등의 순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생가보존은 커녕 이당기념관조차 문을 닫았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선생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고 한다. 비뚤어져 나가는 제자 몰래 부모를 만나 마음을 다독이게 했고, 미대 편입을 앞둔 제자를 위해 애지중지하던 골동품을 기꺼이 내놓는가 하면, 군대간 제자를 잘봐달라며 부대 윗분들에게 선물할 그림까지 직접 그렸다고 한다.

   장화백은 20대 시절 선생에게 쫓겨날뻔 했던 일을 떠올렸다. "선생님은 화가생활로 벌이가 어려워 종로에서 미산이발관을 운영하셨어요. 하루는 이발관에 들러 면도사 아가씨에게 농담을 걸었는데 옆에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누워있던 사람이 바로 선생님이셨던 겁니다. 그 자리에서 '당장 나가라'는 호통과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다음날 용서를 빌러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지방에 가고 안계셔 진짜로 쫓겨나는구나 생각했죠. 근데 선생님께서 제 고향인 충남 온양으로 내려가 어머니에게 '내가 온 것은 비밀로 해달라'며 '주봉이에게 더 관심과 정성을 쏟아달라'는 부탁을 하셨답니다. 나중에 이 얘기를 듣고 선생님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당은 훌륭한 교육자이자 독실한 종교인이었다고 한다. 장 화백은 "온통 남화(문인화)풍이 득세하던 시절에 환쟁이들이나 하는 북화의 명맥을 유지해야 미술계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며 고집하셨고, 주일에 교회는 나가지 않아도 잠자리에 들기 전 1시간씩 기도를 하신 것을 보면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원칙과 소신을 지켜나가신 참된 스승이셨다"고 선생을 기억했다.

<이우성기자·wslee@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