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 출신 대법원장 조진만(趙鎭滿·1903~1979).
'학창시절 3·1만세운동에 동참했다가 자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고등문관시험사법과에 합격(1925년), 제5대 법무부장관 역임, 우리나라 민사소송의 틀을 세운 법조인, 판결문을 한글화 시킨 장본인,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절제된 삶을 살아 온 격변기 대법원장….'
그는 190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정확히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인천이 고향이며, 어린시절 인천에서 생활한 것은 분명하다. 경기고를 잠시 다녔다.
경기고교 동창회에 따르면 조진만 대법원장은 “모교에 입학했던 것은 사실이나 졸업했다는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1923년 경성법학전문대학(京城法學專門大學·서울법대 전신)을 졸업했다.
고 이영섭 대법원장의 경기고교 동창 회보를 통해 조진만 대법원장은 모교 2학년때 3·1만세 사건에 참여했고,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학교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다 경찰에 잡혀갔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는 나이도 어렸고, 우리나라 제1의 명문학교를 다니던 터라 경찰은 그를 특별히 석방시켜주면서 '반성문'을 써오라고 주문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조 대법원장은 이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내가 내 나라의 독립을 외쳤는데 반성문을 쓸만한 잘못이 무엇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동기생들과 함께 그해 경성법전(京城法專)에 입학했다. 조 대법원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925년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당시 나이는 22세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최초로 일본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이다.
합격이후 경성지법 사법관 사보를 거쳐 1927년부터 해주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다. 법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후 평양지법과 대구지법 등을 거쳐 해방전인 1943년 공직에서 물러났다가 1951년 제5대 법무부 장관에 발탁되었다. 법무부 장관 재임은 1년을 채우지 못했다.
1960년에는 서울 제1변호사회장을 역임한 뒤 1961년에 제3대 대법원장에 임명돼 4대 대법원장까지 7년여동안 청렴결백한 법관으로 법조인들의 귀감이 됐다. 당시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어려워 할 정도로 바른말과 직언을 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역대 대법원장들은 정치적 격변기때마다 수난을 겪은 것과는 달리, 7년여 동안 대법원장을 지내면서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을 수 있었다고 동료 법조인들이 증언했다.

조 대법원장과 제7대 대법원장을 지낸 이 대법원장과의 인연은 남다르다. 이 대법원장의 추억이다.
이 대법원장은 해방이후 법관들의 봉급이 쌀 한 가마니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박봉이라 법관을 그만두고 이화여대 교수를 할때 조진만 대법원장을 찾아갔다고 한다.
“하도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법관을 그만뒀습니다”하고 조 대법원장에게 말했더니, “이 사람아! 자네가 배고플적에 난들 배고프지 않겠나. 법관이라는 것이 다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거지”라는 말을 듣고 이 대법원장은 법조계로 돌아왔고, 그는 훗날 대법원장에 올랐다. 조진만 대법원장과의 만남으로 그의 인생이 바뀐 셈이다.
그의 삶에서 느낄 수 있듯이 법조계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조 대법원장은 대법원장에 취임하자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우리나라 민사 소송의 틀을 잡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일본에서 배우고 익힌 사법제도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쳐 활용하면서 민사소송 체계의 기초를 다졌다.

그는 특히 대법원장 시절 판결문을 한글로 쓰도록 하는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로선 엄청난 일이었다. 이유는 우리나라 말이 있는데 왜 다른 나라말로 판결문을 쓰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재야법조인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한글화를 추진, 법원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판결문 뿐만 아니라 법원의 모든 문서를 한글로 전용토록 했다.
퇴임이후에도 그의 삶은 한결 같았다. 1968년 대법원장 퇴임이후 그는 서울 종로구 계동 104의 4에 새로 마련한 2층 양옥 집으로 이사해 외부인사들과의 접촉을 끊었다. 100여평의 사저엔 20평 남짓한 잔디도 깔고 대문을 석조로 대폭 보수했다고 당시 언론은 그의 삶을 보도했었다. 가족은 첫째 부인과의 사이에 3남을 두고 있으며, 재혼한 부인과는 1남 1녀.
전처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 조언(변호사)씨와 조윤(변호사)씨는 부친의 뒤를 이어 법조인이다. 현직과 퇴임이후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는 물론 기고, 회고록 조차 쓰거나 펴내지 않았다. 당시 집을 기습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법관이 일반인과 같은 생활을 하면 곧 비난의 대상이 되는 한국 실정에 비추어 법조인들은 더욱 소심해지게 마련”이라며 재임기간중 특별히 감격했던 일, 슬펐던 일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었다고 전했다.
재혼한 부인 홍순희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재임시에도 미국 등 3개국의 방문 초청과 박 대통령이 세계일주 여행권을 선물하겠다는 권유에도 '외화를 낭비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뿌리쳤다고 한다. 대법원장 시절 축사를 쓰기 위해 폐지 5장 중 1장을 홍 여사가 다른 일에 쓴 것을 알고 국민의 혈세임을 잊어버린 망동이라고 크게 꾸지람을 했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삶을 살았다.
특히 그는 퇴임하면서 후배들에게 볼품은 없으나 '담담한 물맛' 같은 생활로 일관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그는 대법원 청사를 지을 때 한글로 '큰 터에 머릿돌 놓았다. 길이 맑고 밝고 바르다'라고 적는 등 한글 사용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그는 물맛이 짜고 맵기를 바라는 것은 법관이 이미 사도(邪道)의 길목에 들어서 길 바라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를 우리 모두 되새겨야 할 때 같다.
■ 대법원장 퇴임사
토요일 귀한 시간에, 이처럼 법원직원 여러분을 모이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내일, 10월 20일 일요일 정년으로 대법원장 직에서 물러나게 되므로 퇴임인사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덕을 닦지 못하고, 배운 바 적은 자로서 재판사무에 얼마쯤 경험이 있다는 까닭으로, 그 그릇이 아닌데도, 1961년 7월서부터 오랫동안 법원의 최고책임자의 자리를 감히 맡고 있었습니다.
당초에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재덕을 잘 헤어리지 않고 국민이 믿어주는 법원, 옳은 일을 이행하는 법원, 끊임없이 근면하는 법원, 인화있고 단결된 법원, 그리고 명랑한 법원을 이룩해 보자고 큰 소리로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만이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법관의 직분을 다하게 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매우 비근한 일이나 실현은 가장 어려운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뒤, 이를 목표하여 힘을 기울여왔으나, 무능한데다가 법원이란 원래 인원, 시설, 예산 등 여러면에 제약이 많고, 복잡한 사건의 폭주와 사무처리 절차의 비현대적인 점 등으로 예기하였던 목적을 못 달하였다고 스스로 인정하여야 하겠습니다.
그중에 얼마쯤 목표를 향하여 나간바가 있다면, 이는 직원 여러분이 분투·노력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그동안의 잘 못된 점에 대한 모든 꾸지람은 본인이 홀로 달게 받겠습니다.
직원 여러분께서는 위에서 말씀한 목표 달성에 대하여 계속 힘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인은 굳은 뜻을 세운 바 없이 법률책을 좀 읽고, 철이 덜 나서 법관이 되어, 평온·평범한 인생살이를 하게 한곳이 법원입니다.
잔 뼈가 굵어진 내집입니다. 모든것을 잘 모르고 있음을 개닫게한 스승입니다. 그 온정은 잊을 길이 없습니다.
본인은 물러간 뒤에도 아마 법원 근처에서 방황·소요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법원의 발전·향상이 곧 우리 대한민국의 발전·향상임을 여러분은 명심하시어 꾸준히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댁의 만복을 빌면서 퇴임인사를 맺겠습니다.
1968년 10월 19일 대법원장 조진만
인터뷰/조진만 대법원장 아들 조윤씨
"기억나는건 '절제된 삶'… 모든글 한글만 사용해"

조진만 대법원장의 셋째아들인 조윤(71) 변호사는 "아버지는 '절제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며 "자기 생전에 마음에 드는 땅과 골동품이 있어도 절대 구입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식들에게 사물을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어떤 물건을 사면 나중에 이익이 될 것 같다는 말씀은 자주 하셨지만, 정작 자신은 '흠'이 될까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부친에 대한 기억은.
"엄격하긴 했지만, 자식들에게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습니다.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을 바라셨던 모양입니다. 어려서부터 한학과 서방공부를 하셨던 터라 아는 것이 무척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어도 먼저 아는 척하거나 말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주로 남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편이었습니다. 자식들은 그 것이 불만이기도 했지요. 아버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아 함부로 아는 척을 할 수도 없었거든요."
-판결문 한글화를 추진했는데.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공부를 많이 했던 터라 한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지요. 그런 연유로 집에는 늘 고문서들로 가득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한문공부를 그렇게 많이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집에서 자신의 이름을 한문으로 쓰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메모와 글씨를 한글로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자신과의 약속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한글학회에 친구분들이 많이 계셨는데 그들은 늘 아버지를 한글보급에 일등공신이라고 말할 정도였지요."
-형제 두분이 아버님의 뒤를 이어 법조인이 됐는데.
"아버지께서는 형님은 처음부터 법조인으로 키우시려고 했습니다. 저는 법조인 보다는 이공계(화공과)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는데 대학시험을 앞두고 아버님께서 법대를 권유하셨습니다. 후회는 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근 과거사 문제 등으로 옛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 움직임 때문인지 여러가지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다며 말을 아꼈다.
<송병원기자·song@kyeongin.com>
송병원기자·song@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