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을 든 군인이 그려진 벽 앞에서 천진스럽게 웃고 있는 팔레스타인 아이들.
지도에 없는 나라, 팔레스타인은 어디에 있는가.

2월 21일부터 지난 1일까지 1주일 남짓 국제분쟁지역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을 다녀왔다. 경기도에서 주관한 대학생 평화메신저 해외파견 일행을 따라 민족 이산의 경험과 전쟁 유산이 남아 있는 중동의 화약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보낸 시간은 ‘상상력의 국제연대’라는 가치를 재확인하는 좋은 기회였다.

지난 2월 9일, 샤론 총리와 압바스 수반이 평화협정에 조인했지만, 두 민족 사이에 형성된 민족 갈등의 골은 깊어 보였다. 그 첨예한 현장 중의 한 곳이 가자(Gaza)지구이다. 2월 22일 오후 4시(현지 시간) 무렵,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상징적 장소인 가자지구앞 체크 포인트(check point)는 언뜻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 가자는 어디인가. 중동 인식의 포탈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의 작가 가싼 카나파니는 '가자에서 온 편지'라는 작품에서 “이 가자! 사람을 가족과 집과 추억으로 끌어당기는 이름 없는 원인은 무엇일까?”라고 토로한 곳이 아니던가.
 
70㎞, 폭 20~30㎞에 이르는 가자 지구는 인구 100만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사는 게토지역이다. 그러나 이 게토지역에 가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스라엘군의 체크 포인트에서 출입 허가증을 받아야만 출입이 허용되었다. 가자 지구 앞에서 만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굳은 표정으로 따가운 햇살 아래 ‘침묵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기다림에 지쳤다’라는 표현은 수정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풍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 표정과 몸짓에서 너무도 오래되어 ‘익숙해진 기다림’의 풍경을 엿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어느 팔레스타인 여인은 “6시간째 출입 허가를 기다렸다”며 철조망 너머 가자 지구를 힐끗 쳐다보았다. 한없이 그늘 깊은 시선에 어쩌면 팔레스타인의 ‘가난한 역사’가 묻어나오는 듯했다. 자신의 집과 올리브 밭에서 내쫓김을 당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약 10년 전 이 지역을 방문한 스페인 작가 후안 고이티솔로는 '전쟁의 풍경'이란 책에서 “이제 기억과 꿈 속에서만 존재하는 주택과 농장의 열쇠, 재산권리증을 정성을 다해 보관하고 있었다”라고 보고했다.
 
그랬다. 비록 가자 지구엔 가볼 수 없었지만, ‘거대한 감옥’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여전히 옛집의 열쇠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야스프(Yasoof) 지역에서 만난 네담 파와즈씨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비록 말은 잘 안통하지만, 마음과 마음이 통한 것일까. 네담씨는 “팔레스타인과 한국 모두 평화로운 세상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면서 옛집의 열쇠를 보여주었다. 집 없는 열쇠, 뿌리 뽑힌 올리브 나무는 일종의 그래피티와 비슷한 팔레스타인의 벽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문학예술 역시 김지하의 '오적'처럼, ‘뿌리 내림’과 저항의 의미를 특유의 이미지로써 강조하는 내용이 대다수였다. 그것은 이 땅이 “저 옛날 옛적부터 / 아버지가 돌을 치워 수풀 동산으로 일군 / 골짜기”(모하메드 다르웨쉬作-'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분리 장벽은 8m 높이 만큼이나 완강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술을 깨물면서 “자신의 꿈은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람 누구나 현재 진행되는 평화협정에 대해 ‘신뢰’하지 않았다. 히브리대 학생도, 베들레햄대 학생도,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도 “몇달 후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불신했다. 두 민족 사이에 형성된 견고한 불신의 벽에서 상상력의 국제연대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비록 작은 힘이었지만, 평화메신저 일행이 1주일 동안 의료봉사를 하고 파괴된 집을 청소한 일은 작은 실천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으리라.〈고영직 문학평론가,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분쟁을 넘어 ‘타자의 철학’은 가능한가?
 
분쟁의 땅에서 타자의 철학은 가능한가.
 
1948년 나크바(nakba, 대참사) 이후 두 민족 사이의 상생과 평화의 사유는 여전히 요원해 보였다. 특히 용어 대립이 매우 첨예했다.
 
8m 높이에 달하는 ‘장벽’을 두고도 두 진영의 용법은 달랐다. 이스라엘 측은 보안(security) 장벽이라고 했고, 팔레스타인 측에선 인종차별적 분리(separation) 장벽이라고 주장했다. 그뿐 아니다. 이스라엘 교통 표지판은 점령자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타자 배제의 수사학은 두 민족 구성원들에게 기억의 압축파일처럼 저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평화메신저 활동 중에 만난 대학교 탐방은 그 좋은 사례가 될 법하다. 팔레스타인의 베들레햄대학 측에선 2002년 3월 9일 이스라엘군에 의해 미사일 공격을 받은 도서관을 보여주었다. 구멍이 뻥 뚫린 포탄 자국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