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북부 미군주둔 역사=동두천지역에 미군이 처음으로 장기적인 주둔을 시작한 것은 지난 1951년 7월. 미24사단 미군휴양소가 들어서면서부터다. 미군 주둔이 시작되면서 주민 소개(疏開)와 토지징발이 이뤄졌다. 당시 국방부 관재과에서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옥보상은 전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저 땅에 대해서만 국가발행채권과 징발보상증권이 지급됐지만 오랜 기간후에야 현금으로 바꿀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분실 등의 이유로 돈을 받지 못한 주민들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미3사단 6연대와 25사단 24연대 등이 주둔했다. 이어 미7사단이 주둔하였고 보병 제2사단이 현재까지 이곳에 주둔하게 됐다.
의정부지역의 경우 한국전쟁중에 다수의 군부대가 주둔하는 과정에서 미수복지구에 살던 피란민 중 상당수가 군부대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뒤 전방지역을 관할하던 미1군단은 야전천막 일색이었던 보급기지와 통신대 지휘소 등을 영구건물로 바꿔나갔다. 자갈과 돌뿐인 황무지였던 가릉동 일대에는 미1군단 사령부 등 군 기지가 들어섰고 군단 사령부를 중심으로 통신대, 공병대, 포병대 등 지원부대들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당시 의정부지역 인구는 약 6만명. 작은 시골마을이 거대한 군사도시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의정부와 동두천 등지에 주둔하게된 군부대는 군사적 목적에 의해 주둔지역 토지를 강제로 징발했다. 그리고 변변한 보상조차 받지 못한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기지 주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지촌의 굴곡진 역사는 시작 또한 비뚤어진 상황속에서 이뤄진 셈이다. 이렇게 도시로서의 기능보다 군사상 전략 요충지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경기북부 지역은 비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미군기지 및 반환 현황=미국의 전략에 따라 주한미군의 철수와 기지 이전은 수시로 이뤄졌다.
1971년 닉슨 독트린에 따라 미1군단과 미7사단이 본국으로 철수했다. 그리고 전투사단인 미2사단이 경기북부지역에 유일한 미군으로 남게 됐으며 현재 이뤄지고 있는 미군기지 이전·반환은 이 시기에 형성된 틀을 바탕으로 마련된 것이다. <표 참조>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는 동두천지역의 경우 2사단의 주력부대인 캠프 케이시 등 5곳에 군인과 군무원 등 1만7천여명이 주둔하게 됐다. 의정부지역에는 2사단 사령부인 캠프 레드클라우드를 비롯해 총 8개의 미군부대가 있다. 파주의 경우 공동경비구역(JSA) 경비대대를 포함해 13개의 미군 시설이 있고 이밖에 양주와 가평, 연천 등지에 소규모 시설이 산재해있다.
현재 추진중인 미군 기지 이전·반환은 지난 2002년 발표된 한미 연합토지관리계획(LPP)에 따른 것이다. 양국이 밝힌 LPP의 목적은 주한 미군의 기지체계 조정과 국토의 효율적 활용. 여기에 미국의 군사전략이 변화하고 주한미군 재배치 계획이 새롭게 반영되면서 지난해 7월 LPP협상이 타결됐다. 이에 따라 이라크 파병과 이전 등의 이유로 군인들이 떠난 캠프 자이안트와 그리브스 등 파주 지역 시설 두곳을 비롯해 의정부 캠프 홀링워터 등이 올해 반환된다. 또 캠프 라과디아와 캠프 시어스(이상 의정부), 캠프 에드워드(파주) 등이 내년에 반환된다.
그러나 기지 반환과 달리 소속 군인들의 철수와 이전 시기는 명확치 않다. 실제로 캠프 라과디아의 경우 내년 반환이 예정돼있지만 이미 폐쇄됐고 캠프 카일의 경우 오는 2007년 반환이지만 이미 부대는 철수중이다. 파주지역의 경우 민통선인근 소규모 부대를 제외하고는 미군들이 완전히 빠진 상태다. 1년전 언론보도를 통해서만 접하던 미군 철수와 기지 폐쇄문제를 올들어 현실로 목격하면서 지역사회의 충격파는 적지 않다.
동두천시 관계자는 “작년에 3천600여명이 이라크로 파병됐는데도 동두천지역 경제가 휘청댔다”며 “한미협의에 따라 2008년 이후 향후 동두천 주둔 미2사단 전체 병력이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면 동두천 지역경제는 파탄에 이를 것”이라고 말했다.
/지역사회부:김환기 경기북부권취재본부장·오연근·최재훈
사회부:이성호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