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한미군 재배치에 따라 한국인 근로자들이 최근 감원이 되고 있는 가운데 11일 한 주한미군 근로자가 불안하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미군부대를 바라보고 있다./취재팀
'하우스보이'.
한국전쟁이 끝난후 수많은 전쟁고아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피해 미군기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살기 위해 미군들의 구두를 닦았고 옷을 빼앗다시피해 빨래를 했다. 그러면 몇푼 안되는 달러나 초코릿이 그들의 손에 쥐어졌다. 이들을 바로 '하우스보이'라 불렀다. 하우스보이 중 일부는 미군에게 입양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또는 미군기지가 정착하면서 정식 직원이 되기도 했다. 사회가 안정되면서부터 하우스보이는 사라지고 정식으로 서류를 내고 미군기지에서 일할수 있었다.

●하우스보이 30년 인생=“하우스보이 생활 하면서 4남매를 대학교까지 공부시켰으면 됐지, 뭐 있겠나.”
올해 73세의 김성철(가명·의정부시 호원동)씨. 경상도가 고향인 김씨는 한국전쟁이 끝난뒤 먹고 살기 위해 미군기지가 몰려있는 의정부에 터를 잡았다. 김씨는 “6·25 전쟁이 끝난후 전쟁고아들은 미군 부대 안에서 청소, 구두닦기, 빨래 등 잔심부름을 하며 먹을거리나 달러를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은 하우스보이들을 위해 의정부시 곧은골 삼거리(현재 오거리)에 분수대를 만들어 각종 세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물론 주민들도 함께 사용하는 이른바 공용 빨래터인 셈이다. 미군이 정착단계에 들어서면서 이들 하우스보이들에 출입증을 만들어줬다. 부대를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청소와 세탁 등을 하는 사실상의 비정규직 근로자의 신분이 된 것이다.
김씨는 “하우스보이 일부는 영어도 배우며 함께 지내던 미군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며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은 하우스보이들은 대민지원을 위한 통역관 등 각종 행정직에 종사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씨 자신도 당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미2사단에서 30여년간 근무할수 있었다. 김씨는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면서 4남매를 대학교까지 공부시켰다”며 “어린시절 배고픈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며 힘겨운 생활을 보냈지만 지금은 손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삭감으로 미군부대내 한국인 종사원들이 감원된다는 말을 언론을 통해 들었다”며 “이들은 우리가 어려운 시절에 외화를 벌여들인 사람들”이라며 “정부는 이들에게 그만한 대우를 해줘야한다”고 말했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얼마전 캠프 라과디아(50공병중대)의 철수를 지켜본 강진호(가명·55·의정부시 가릉동)씨의 마음은 착잡하다. 캠프 라과디아에서 30여년간 일해온 강씨는 “한·미연합토지관리 계획에 따라 부대가 떠난다, 떠나지 않는다 말들이 많았었는데 막상 부대가 떠나니까 시원섭섭하다”고 말했다. 강씨는 또 “어려서부터 미군들을 봐왔고 이 부대에서 30여년간 근무하면서 미군들과 미운정 고운정 다들었다”며 “지난 5월 6일 성조기와 부대기가 내려질때 미군들이 떠나는지 실감했다”고 말했다. 강씨는 “지금까지 미군부대에 종사하면서 딸 둘을 대학까지 보내고 살만하다”고 밝히면서도 해고의 불안감을 감추진 못했다. 강씨는 “빨리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이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또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면서 한국인들을 얕잡아 보는 등 미군들의 잘못된 행태들을 경험했을 때는 일부 미군철수 주장들을 이해할 수 있으나 아직은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했을 때 미군철수는 시기상조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인 근로자들의 엇갈린 삶=의정부시 송산동 소재한 캠프 스텐리에서 기술직으로 6년간 근무한 지윤철(가명·36·의정부시 민락동)씨는 지난 97년 기술직으로 입사했다가 2003년에 퇴직한후 현재 서울에 있는 모 건설회사의 차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씨는 “의정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미군들을 봐왔다”며 “지난 6년여동안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이들의 잘못된 인식보다 이들로부터 배운점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지씨는 “미군들은 대부분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자신에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누리면서 생활한다”며 “우리는 모든일을 할때 대부분 '빨리 빨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이들은 매사 아무리 급한 일이라도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정확히 일을 처리하고 독촉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는 한국인근로자들이 생존권을 보장해 달라며 집회를 하는 것을 여러번 봤다”며 “자신은 기술이 있어 건설회사 간부로 있지만 종사원들의 아픔을 충분히 안다”며 “이들에 대한 대책이 빨리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반면 지난해 11월 퇴직한 한정수(가명·43·파주시 월롱면)씨의 사정은 전혀 딴판이다. 한씨는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캠프 에드워드내 PX(생활용품 슈퍼마켓)에서 20년간 근무하다 지난해 11월 미군철수로 일자리를 잃었다.
한씨는 “퇴직금도 없는 상황에서 비슷한 일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쉽겠냐”며 “그동안 정부에서 나온건 노동부 산하 고용보험센터서 매월 10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