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필요에 의해 만나고 갈라진다. 때론 소멸되거나 새로운 길로 대체된다. 길의 필요성은 소통이다. 무엇을 위한 소통이냐에 따라 역할이 구분된다. 소통이 축적되고, 오랜 세월 지속된 길은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유물이다. 사진은 남·북한강이 만나는 양평 두물머리를 가로지르는 양수대교와 용담대교, 소통을 위해 오늘도 그 길 위에는 역사의 발자취들이 달리고 있다. /조형기편집위원·chg@kyeongin.com

'길, 그 곳으로 가다'의 본격적인 현장 답사에 앞서 경인일보가 경기지역 역사문화탐방 시리즈 두 번째로 왜 '길'(路)이란 테마(Theme)를 설정했는가를 개괄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길이 지닌 역사성과 그 속에서 파급되는 길의 다양한 기능과 변화, 그 변화로 인해 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진·퇴보 양상에 대해 살펴본다. 이는 '길, 그 곳으로 가다' 시리즈가 단순히 현재의 길에 대한 이야기만을 전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길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양상 점검을 통해 길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예측 가능한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서다. '오늘날 우리에게 옛길은 무엇인가'란 주제로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이자 역사지리학자인 김종혁씨로부터 ●길의 역사성 ●길의 유래와 발달 ●전근대 한국에서 길의 기능 ●길의 변화로 인한 한국의 근대적 변화 등을 소주제로 두 편의 글을 게재한다.〈편집자 주〉

   #길의 역사성
   몇 해 전 재한일본인 지리학자 도도로키 히로시(轟博志) 박사가 조선시대의 주요 간선도로였던 영남로(嶺南路)와 삼남로(三南路) 전구간을 걸어서 답사하고, 그 이야기를 '일본인의 영남대로 답사기'(한울아카데미刊), '도도로키의 삼남대로 답사기'(성지문화사刊) 등 책으로 펴냈다. 이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일본인이 왜 그 먼 거리를 걸었지?” 또는 “걷느라 고생이 심했겠군” 정도의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책은 조선시대의 길이 오늘날에도 존재하며, 그 구체적인 경로를 현재 시점으로 확인시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요즘에는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도로건설이 워낙 왕성해서 무심결에 '길이란 본디 인위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전례가 없는 전적으로 새로운 길을 건설한 것은 근대적 토목기술과 장비를 갖추게 된 이후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시점은 20세기에 들어 시작된다. 돌다리(石橋) 하나 놓는데도 토목기술의 측면이나 재정사정, 부역동원 등의 문제를 부담스러웠던 전근대에 오늘날 국도 같은 전국 단위의 장거리 노선을 기획하고 건설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제가 식민지 경영을 위해 추진한 이른바 '신작로'(新作路)도 거시적으로 보면 '새 길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대대로 존재해오던 길을 곧게 펴서 넓히고 평평하게 닦은 정도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가 가고자하는 바로 그 '길'(路)이다.

   말 그대로 새로 만든 신작로의 본격적인 등장은 20세기가 시작되고 나서도 한참 지난 후, 아마 철교·터널·고속도로·고가도로 등의 건설과 더불어 시작된다. 전통적으로 '길을 건설한다’고 표현하기 보다는 '길을 연다’거나 '길을 다스린다’고 표현한 것은 특별한 사정에 의해 일시 닫힌 길(폐도, 閉道)을, 잡풀이나 그 밖의 장애물을 걷어내고 다시 이용한다거나 기존의 길을 정비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해석된다. 원래 길이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길이란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필요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그 기능이 소멸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출현하지 않는 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아서 우리가 현재 이용하는 길은 대부분 그 형태가 조금 바뀌었을 뿐, 아주 오랜 기간을 두고 명맥을 이어오던 것들이다. 이 점에서 길의 역사성이 존립한다. 이 처럼 길은 유구한 시간성을 담지하는, 박물관 안에 박제되어 있지 않은, 여전히 그 기능을 발휘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유물이며 동시에 사료이다.

   #길의 유래와 발달
   '길'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우마·수레 등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도록 일정한 폭을 유지하며 땅 위에 길게 늘어져 있는 선”이다. 그러나 길의 종류에는 땅길 외에도 물길이 있으며,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발전 또는 활동의 방향, 방법이나 수단, 사람으로서 의당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등과 같은 의미도 있다. 도가나 유가에서 '길'(道)은 핵심 개념이기도 하다.

   중국에는 길을 의미하는 글자가 많은데, 주례(周禮)에 따르면 우마가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을 '경'(經), 큰 수레가 통하는 소로를 '진'(軫), 승거(乘車)가 갈 수 있을 길을 '도'(途), 승거 2대가 나란히 지날 수 있는 길을 '도'(道), 3대가 갈 수 있는 넓은 길을 '로'(路)로 구별해 사용했다. 물길에 해당하는 하천도 하폭이 넓은 것에서부터 차례로 하, 강, 천, 수로 구분했고, 각각에 대한 용례도 도하(渡河), 진강(津江), 제천(濟川), 섭수(涉水)하는 식으로 달랐다. 원래 도로의 뜻에는 육로 뿐 아니라 수로도 포함되지만, 요즘은 육로만을 지칭하는 것이 통례이다.

▲강원과 경기를 잇는 양평군 용문면 광탄리의 6번 국도와 중앙선(왼쪽). 용인시 원삼면 곱등고개에 설치된 동물이동통로(오른쪽).

 처음에 길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는데, 그 중 가장 널리 인정받는 것은 '동물이동설’이다. 예컨대 아프리카 어느 지역의 원숭이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서식지에서 일정거리 떨어진 샘까지 정기적으로 이동해야 했는데, 이 과정이 장기간 반복되면서 그들이 다닌 루트(route)가 길(road)이 됐다는 식이다.

   그 루트중 몇 군데는 주변 원주민에게 원숭이 사냥의 주요 길목이 된지 오래이다. 야생 동물 이동에서 유래한 길의 대표적 사례는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더욱 잘 나타난다. 이 곳 중앙대평원에 서식하는 들소(bisons)들은 계절적으로 큰 무리를 지어 이동하고, 들소를 사냥해 식량과 가죽을 얻어 생활했던 인디안 부족들(Plains Indians) 역시 들소떼와 함께 계절적 이동을 하며 살았다. 이 길은 대체로 하천, 호수, 샘 등 물이 있는 곳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18~19세기 서부개척민들의 이동로로 쓰였고, 이 후에는 동부와 서부지역을 잇는 급행우편로(Pony Express)와 동서횡단철도(Union Pacific Railways)로 발전했으며, 동서 횡단 고속도로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비슷한 예는 우리에게서도 발견된다. 경북 문경에 잔도(棧道, 험한 벼랑에 나무로 선반처럼 내매어 만든 길)로 유명한 관갑천(串岬遷)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같은 사연을 기술하고 있다. "고려 태조가 남하하여 이 곳에 이르렀을 대 길이 없었는데, 토끼 한 마리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수가 있었으므로 토천(兎遷)이라 부른다(高麗太祖南征至此不得路 有兎因緣崖而走 遂開路以行因稱兎遷)."

   인간 출현 이전에 길이 있었다면 길은 이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지질시대의 유물이 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길의 형성에 미치는 인간의 영향력은 점차 강해졌다. 도로 건설에는 대단위 노동력이 투여된다는 측면에서 계급분화가 확연해지고 강력한 지배자가 통치하는 고대국가의 출현은 도로발달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로마제국은 일종의 통치기구 또는 통치수단으로서 행정통신로와 조세수송로를 정비했고, 수레와 전차의 하중을 지탱해 사용의 편의와 속도를 높이기 위해 주요 도로 위에 박석(薄石)을 깔아 포장했다.

   유럽의 길은 중세 때 상대적으로 퇴보했다가 근대국가가 출현하면서 다시 발전했다. 나폴레옹의 비엔나 전투, 프랑스혁명군이 불렀던 라 마르세예즈, 레지스탕스의 형상이 두 기둥에 새겨진 개선문과 이를 중심으로 샹젤리제 거리를 포함한 방사상의 12갈래 대로는 프랑스 제국의 통치·승리·왕권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지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해 발달해 온 근대의 길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도래하고, 이에 따라 점차 상품유통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본격적으로 계획·설계·건설·운영되기 시작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