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경기동부-강원을 잇는 평해로 (2)
불과 몇 년 사이 '양평’이란 지명이 붙은 해장국이 전국적인 브랜드가 됐다. 양평군은 예산 한 푼 안들이고 지자체를 홍보하고 있는 셈이다. 음식의 출처는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 신내마을의 한 해장국집. 개군면에서 양평읍내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다. 이미 유명세가 붙어서인지 답사팀이 그 곳을 찾아간 시점이 오후 2시였는데도 넓은 음식점 안은 손님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해장국집이 자리한 신내는 채꾼, 즉 '소몰이꾼'들로 붐비던 마을이었다. 주민들의 기억에는 8·15 해방 전까지도 주막이 여섯 집이 있었는데, 채꾼들이 소를 몰고 가다가 개천을 끼고 있는 이 곳에서 하룻밤을 재우고, 이튿날 여물을 먹인 후 양평장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작 그 해장국집은 역사가 20여 년 밖에 안 됐다고 하니 그 길목의 위력은 이러한 오랜 역사가 만들어 준 셈이다.
양평군은 과거 양근현과 지평현이 합쳐져 하나가 된 고을이다. 도보로 서울에서 평해로 여정에 오르면 강원도 원주에 이르기 전까지 많은 시간을 양평에서 보내야 한다. 양평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장거리 여행객, 이장 저장 옮겨 다니는 장꾼 그리고 소몰이꾼은 목적지가 같더라도 꼭 같은 길을 이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 장의 장날에 맞춰야 하는 장꾼들은 비록 길이 가파르고 험하더라도 되도록이면 여행거리가 짧은 지름길을 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반면 여행객은 적당한 간격으로 요기도 하고 숙박도 되는 주막같은 시설이 있는 길을 택한다. 소를 한꺼번에 대여섯 마리씩 몰고 가야하는 소몰이꾼들은 소들의 안전을 위해 조금 우회하더라도 경사가 가파른 길은 피한다.
이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키는 길은 당연히 여행객들로 붐비게 되고, 또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길의 환경은 더욱 좋아진다. 그러나 평해로의 양평 관내 길은 그렇지 못하여 여러 갈래 길이 생겨났다.
경기도와 강원도 경계에 위치한 양동면 삼산리 금곡마을에 사는 주민에게 들으니 걸어서 서울로 가려면 석곡리 석실→금왕리→고송리→용문면 광탄리→다문리를 거쳐 간다고 하였다. 원래 평해로 길인 석곡리 석실에서 매월리→구둔치→지제면 일신리 구둔→무왕리→전양고개→지평리로 지나는 길은 비록 지름길이기는 하지만 구둔치와 전양고개(전양현·田良峴)가 가파르고 험하다보니 이 보다 편한 길이 개척되면서 이용객이 대폭 줄어든 것이다. 이후 지평읍내나 용문에 장이 없어지거나 제대로 서지 못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평읍내를 지나 용문리로 가기 위해서는 바로 전에 그루고개를 넘고 흑천(또는 검천)을 건너게 된다. 그루고개는 한자로 문현(文峴)이라고 표기하므로 '글고개’라고 해야 할 것인데 주민들은 그루고개 또는 그릇고개라고 부른다.
우시장은 긴 여행에 지친 소에게 목을 축여주고 오물을 씻어낼 개천물을 필요로 한다. 용문의 흑천변은 우시장이 설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천변에 장대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 장대(場垈), 즉 장터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 곳에서 만난 84세 할머니는 열일곱 살에 시집을 왔는데 시집오기 몇 년 전까지 시어머니가 채꾼들을 상대로 국수를 말아 팔았다고 한다. 1930년대 초반까지는 이 곳에 소가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용문 흑천변은 앞서 신내와 마찬가지로 소가 쉬어가는 곳이지 소가 본격적으로 매매되던 우시장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나마 쉬어가던 소마저 사라진 것도 여행객들처럼 채꾼들 역시 가파르고 험한 고갯길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현재 옛 지평현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장시는 용문장이다. 용문장의 성장은 기차와 자동차 이용의 증가에 힘입은 것이다. 용문장은 원래 용문역 앞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대형 마트(할인점)가 들어서고 차로 이동하는 고객, 장차(場車)의 주차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 용문역에서 용문교회 방향의 큰 도로로 장터를 옮기게 됐다. 장이 서는 모습을 보면 인도를 따라 상인들이 장차를 일렬로 주차시키고, 그 앞으로 차에 차양이나 파라솔 등을 잇대어 좌판을 벌인다.
용문장에서 만난 김장근(87)옹은 일신리 구둔이 고향인데 젊어서부터 농사보다는 장사를 직업삼아 일대의 장을 돌아다녔고 한다. 지평장-이천장-양평장-곡수장-용문장이 5일을 주기로 하는 순회 경로였다. 간혹 하루는 쉬거나 물건을 사러 동대문 시장에 갔다고 한다. 김옹으로부터 용문장의 쇠퇴 변화와 함께 곡수장의 번창과 쇠퇴의 역사를 들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채꾼들은 가파른 평해로 고갯길을 외면한 대신 서쪽으로 고달사를 지나 고래산을 넘어 대평리를 거쳐 곡수장으로 들어왔다. 현재는 이 길은 사라지고, 대신 고달사에서 여주 대신을 거쳐 우회하는 도로가 뚫렸다. 이포대교 건너 이천과 여주의 소들도 곡수장으로 왔다. 번창할 때는 150마리 이상의 소가 몰렸다고 한다. 지평 읍내장이 곡수장에 밀려 제대로 장시를 유지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이 지역 주민들이 즐겨 쓰는 표현처럼 곡수장은 동대문 밖에서는 제일 큰 장이었다.
여주장이나 이천장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니 양평을 대표하는 장이었던 셈이다. 음력 7월 15일 백중날 백중장에서는 서커스단 공연도 있었고 경상도 진주에서 씨름단도 올라왔다고 한다.
잘 나가던 곡수장은 뒤늦게 부활한 지평장과 용문장 및 우시장을 만든 양동장으로 상권이 흩어져 쇠퇴 일로를 가다가 부근의 여주 대신장이 장날을 곡수장과 같은 4·9일로 옮기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1980년대 초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곡수장의 다음 장인 양평장의 갈산은 장길의 변화에 힘입어 읍치가 된 곳이다. 영조 23년(1747)에 이 곳으로 이읍(移邑)하기 전까지는 지금의 옥천면 옥천리가 양근현의 읍치였다. 이읍한 후 그전의 읍치인 옥천은 고읍(古邑)이 되었다.
2년 전인 2003년 3월경에 '다시보는 경기산하' 연재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옥천면 사나사 경내로 들어가기 전 입구에 서 있는 불양비(佛養碑)의 당상계비문(堂上稧碑文)은 1747년에 있었던 양근 읍치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다. 이읍 이전에 이미 남한강을 따라 형성된 육로는 갈산을 지나 읍치인 옥천을 통과하지 않고 그 밑으로 길이 열려 자연히 그 위에 위치한 옥천은 읍치 자리를 갈산에 내주게 된 것이다.
강원도 홍천에서 양평으로 넘어오는 장길도 용문장과 양평장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고 지평장을 위축시키는데 한 몫 하였다. 양평군과 신당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홍천군 남면 유목정리에 마방(馬房)이 있었는데 아직도 집과 터가 남아있다. 이러한 곳을 흔히 마방으로 부르지만 말이 교통수단으로 이용되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그 기능을 따진다면 20세기 이후는 우방(牛房)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홍천 양덕원장에서 양평 용두장까지는 15~20리 정도 거리인데, 소를 끌고 홍천에서 용두리로 이동하던 사람들은 유목정리 마방에서 하루 묵고 양평으로 넘어왔다. 지금의 44번 국도와 일치하는 길이다.
강원도 횡성에서 양평으로 넘어오는 길은 대체로 현재의 6번 국도와 일치한다. 횡성군과 양평군 사이에는 도둑고개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고개를 넘으면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풍수원 마을인데, 고개가 높고 험해 예전에 도둑이 끓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도둑고개에도 두 채의 주막집이 있었는데, 경기 강원 간 도계(道界)를 사이에 두고 횡성 쪽에 한 채, 양평 쪽에 한 채 였다고 한다. 횡성 쪽으로 주막집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도 휴게소가 있어 여행객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도둑고개를 넘어 갈운리를 지나 용두장 가까운 곳에 은구비 마을이 있는데 이 곳에도 주막 한 채가 있었다.
홍천길이나 횡성길만큼 주목받지는 않았지만 강원도에서 양평으로 들어오는 또 하나의 길이 홍천군 서면으로부터 용두리로 이어져 있었다. 용두장은 홍천군 서면 주민들이 왕래하는 장이기도 했다. 홍천군의 서면장으로부터 서면 중방대리 아우랏치→대곡리 돌고개→귀랭이→터일→점말(店村)→굴업리 버덩말→뺑치(백양치·白楊峙)마을→양평군 단월면 부안리 통골마을까지는 현재의 70번 지방도와 같은 길인데, 여기서부터 현재의 도로와 갈라져 통골고개를 넘어 여물천 개울을 따라 청운면 여물리로 넘어온다.
평해로의 장길은 교통·도로의 발달과 유통업의 자본화, 주민들의 생활편의로 인해 성장과쇠 퇴의 길을 반복해 온 대표적 길이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 정승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