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깊은 양수리 용진나루에 북한강철교가 놓이면서 양수역의 설치와 함께 오늘날 양수리의 번성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북한강을 가로지르는 철교위로 양수리와 가을 하늘을 뒤로하며 무궁화호 열차가 청량리를 향하고 있다. /조형기 편집위원·hyungphoto@naver.com

   강원도를 이어주는 평해로(平海路)
  
   (3)경기동부의 두 땅길 : 평해로와 중앙선

   철도는 1970년대 고속도로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우리나라 육상교통의 중심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제물포~노량진 사이의 33.2㎞ 경인선은 세계 최초의 영국 철도(스톡턴~달링턴)보다 74년 늦은 1899년에 개통됐다. 경인선 개통 후 경기도에는 경부선(1905), 경의선(1906), 경원선(1914), 안성선(1925), 수려선(협궤·1931), 수인선(협궤·1937), 경춘선(1939), 중앙선(1942) 등이 차례로 부설됐다. 20세기 전반까지 철도는 대량의 화물을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었다. 이에 따라 철도 연선 지역중 새로운 교통 및 상업중심지로 급성장한 곳이 적쟎다. 19세기 끝자락에 등장한 철도는 우리나라의 지역구조를 재편할 정도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는 한국교통사의 획기가 되는 일대 혁신이었다.

   철도가 육운(陸運)과 수운(水運)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부터다. 이 가운데 중앙선은 평해로의 기능을 대거 잠식했고, 수려선 및 이와 이어지는 수인선은 평해로와 함께 수행하던 남한강 수로의 기능을 크게 위축시킨 노선이다. 실제 중앙선 노선은 서울에서 원주까지 평해로 노선과 거의 나란하게 놓여 있고, 일부 구간은 원 평해로 길 바로 위에 철로가 부설됐다. 비단, 평해로 뿐 아니라 경부선·경의선·경원선·호남선 등도 조선시대의 동래로·의주로·삼방로·제주로 등을 근간으로 노선이 획정됐다.

   1939년 4월에 청량리∼양평구간이 우선 개통된 이후, 1940년에는 양평∼원주구간이, 1942년에는 경주까지 383㎞ 중앙선 전구간이 개통됐다. 중앙선은 백두대간의 죽령(689m)을 넘어야 했기 때문에 단양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역 앞에서는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철로가 돌아가야 했고, 더 높은 죽령 정상부에서는 죽령터널을 통해 산허리를 통과하기도 했다. 공사 도중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죽령구간을 넘는 것 때문에 중앙선은 다른 노선에 비해 공사 기간이 길었다. 마치 오늘날 중앙고속도로가 죽령 구간만 남겨두고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먼저 개통한 사례와 같다.

   청량리를 출발한 중앙선은 망우동까지 평해로와 나란히 이어지다가, 잠시 북쪽으로 벗어난 후 남양주 와부읍에서 다시 평해로와 만난다. 이후 팔당~능내~양수~국수~양평~용문~지평역까지는 평해로 길을 거의 답습하고 있다. 물론 지형적인 요인도 있다. 특히 팔당협곡부는 산각이 한강과 예리하게 만나기 때문에 중앙선은 달리 새로운 길을 내지 못하고 평해로와 거의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팔당협곡부에서 2000년에 개통된 신 6번국도 역시 60년 전 중앙선 공사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 건설됐다.

   6번국도 변은 풍치가 아름다워 오래전부터 서울시민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특히 주말에는 행락객으로 붐벼, 왕복 1차선 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간선도로 가운데 확장공사가 가장 늦게 이루어진 것은 원 6번국도(평해로)를 활용해 확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려 다섯 개의 터널을 뚫고 중앙선 철로 위쪽으로 새 길을 냈다. 팔당댐이나 팔당대교, 혹은 하남시 검단산에 올라서면, 전근대의 한강수로와 평해로, 근대 교통의 서막을 알린 철로 중앙선, 그리고 현재 엄연히 자동차시대임을 확정해 보이는 신 6번국도가 아래에서부터 고도가 높은 쪽으로 차례차례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교통사의 흐름이 팔당협곡부에서는 한 눈에 들어온다.

   팔당협곡을 통과한 중앙선은 유서 깊은 나루인 용진(龍津)자리에 철교를 놓고 북한강을 건넌다. 북한강 너머 첫 번째 역인 양수역의 설치는 오늘날 양수리의 번성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895년 경에 제작된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를 보면, 평해로가 통과하는 양수역 남쪽에 위치한 '이수두리'(二水頭里) 또는 '두물머리' 마을에는 평해로를 따라 노변에 약간의 시가지가 형성돼 있었다. 반면 양수역이 설치된 석장마을은 한적한 농촌마을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도로 중심의 지역연결 체계가 철로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지역내 중심지도 따라 옮겨진다. 길과 교통의 변화에 따른 지역경제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양수역이 설치된 양수리에는 버스터미널이 유치되고, 정기시장이 활성화를 띠게 된다. 또 4∼5층 규모의 건물과 대형음식점이 입지하면서 양수리 시가지는 리(里)급 도회에서 보기 쉽지 않은 규모를 이루게 된다. 여기에 면사무소도 양서면이 탄생한 1914년 군청과 가장 가까운 복포리에 있었던 것이 양수리로 옮겨오게 되면서 양수리는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잡아 가게 된다.

▲1939년 청량리~양평 구간의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건설된 양평역. 지금도 경강국도의 체증으로 인해 이 지역 교통량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양평읍에서 지평까지의 평해로 노선은 6번국도보다 중앙선이 더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지평 이후의 평해로는 전양현과 송치를 넘어 원주 안창역으로 이어지는데, 중앙선은 비록 짧은 구간이지만 해발고도 300m대의 이 산자락을 망미터널·구둔터널·지산터널·미봉터널·매월터널 등 다섯 개의 터널을 통해 힘겹게 넘어가고 있다.

   중앙선은 서울·경기 동부지방과 영남 동북부지방을 잇는 종관철도로서, 한강 상류지역과 낙동강 상류지역의 광산·임산·농산 개발을 목적으로 부설됐다. 한편으론 경기 남동부의 산지지역과 충북 동부 및 강원 남부 영서지방의 개발에 이바지한 바도 크다. 이 중 일제시기에 경기동부의 중심지 기능을 했던 양평읍은 중앙선 완공이후 그 여세가 더욱 강화돼 오늘 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38년 통계에 따르면 경기도내 거래액이 백만원 이상을 기록한 장시(場市)는 수원장과 안성장, 양평장 세 곳 뿐이었다.

   양평은 전근대에도 남한강 수로와 평해로 및 강원도 홍천과 양양·고성·간성을 이어주는 평해로의 분기로가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에 한강유역의 수륙교통 및 상업요지였다.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에 양평읍장은 1·6일날 개시하다가 20세기 초에 3·8일로 개시일을 바꾼 이래 현재까지 장이 유지되고 있다. 현재 양평장은 양평군내 뿐 아니라 경기 전역에서도 최고차 시장에 해당할 정도로 규모가 크다.

   '길, 그 곳으로 가다' 2편 '평해로의 장길과 장시'에서도 살펴보았듯, 양평장과 함께 양평의 오랜 전통을 자랑하던 지평장이 쇠퇴해 간 원인은 철로와 함께 도로망이 양평읍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더불어 시내버스 운행도 양평읍으로 집중되는 등 길과 교통의 변화로 인해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수원과 여주를 잇던 수여선의 철교. 농산물 반출의 기능을 상실한 채 교각만 남아있다.
   한편 평해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중앙선과 경부선의 교량 역할을 하는 철도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경부선 천안역에서 출발해 성거~입장~미양을 경유, 안성까지 이어지는 안성선이고, 다른 하나는 1931년에 개통된 수원~용인~양지~이천~부발~여주 사이의 수여선이다. 1925년에 개통된 안성선은 2년 후 노선을 장호원까지 연장해 운행했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철의 수요가 늘자 1944년 안성~장호원 철로를 뜯어냈고, 1989년엔 전구간이 폐선됐다. 수여선은 1960년대까지 근근이 듀지되다가 1972년에 폐선됐다. 수여선은 수원에서 수인선으로 연결돼 인천항까지 이어지는 노선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장호원과 여주는 조선시대부터 남한강 수운의 주요 상업거점으로 발전해 온 도회이며, 동래로(東萊路) 본선이 경유하는 수륙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여주에서 한강을 건너 42번국도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문막과 원주가 하루 일정 거리 안에 있고, 장호원과 남한강 수운의 최대 도회지인 충주 역시 하루 일정 안에 있다. 원주는 평해로와 남한강 및 섬강 수운을 바탕으로 강원 남부 영서지방의 산물이 집산하는 곳이고, 동래로와 남한강 수운을 기반으로 한 충주 역시 남한강 상류지역의 산물이 모이는 곳이다. 결국 수여선과 안성선은 이들 지역의 농림산물을 매집해 철도를 통해 인천과 아산을 통해 바다로 반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설됐다.

   언젠가부터 철도는 다시 그 빛을 잃어버렸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고속철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철도가 옛 영화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일부 사람들은 안성선이나 수여선·수인선을 그대로 유지시켰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 이 주장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여겨진다. 결과론이 될 수 있지만, 철도교통, 특히 지역내 단선철도는 전근대의 수로 및 도보 교통단계와 현대의 자동차 교통단계 사이에서 과도기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나중에 다시 한 번 뜯겨나간 철로선의 흔적을 쫓아 답사하면서 이 문제를 좀 더 깊게 논의해 봐야 할 것이다.

   <김종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역사지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