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평해로에서 만난 사람들(1)
길은 편안하고 그윽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산길, 그 험하고 높다란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 있다. 그 들은 보통 평탄하고 넓은 길을 에돌아 가기보다 애써 산으로 산을 넘어 달려갔던 사람들이다. 한말 경기의병들의 모습인데, 그들은 대개 양근과 지평의 사람들이었다.
세계사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우리의 역사적 자긍심은 '의병(義兵)의 존재'에 있다. 언제 어디서나 꼭 필요하다 느낄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의병은 반만년 유구한 우리 역사를 지켜온 결정적 동력이 아닐 수 없다.
양평 용문산에는 용문사·사나사·상원암·윤필암이 있는데 1907년 의병투쟁이 한창일 때 일제는 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된다는 이유로 윤필암을 제외한 나머지 3개 절을 불살라 버렸다. 그렇게 불탄 '상원암'(上院庵)에는 종소리 신묘한 오래된 범종(梵鍾)이 달린 종각 하나가 남았고, 움막으로 임시법당을 차리고 있었던 정화삼(鄭華三)이 있었다. 깊은 산속 범종의 존재는 의병을 토벌하던 일본군에 의해 알려졌고, 서울 남산 본원사에 조선 범종을 달려고 혈안이 되었던 일본인 야마구치(山口太兵衛)는 술수를 부려 동종을 빼돌렸다. 정화삼은 범종을 판돈으로 전답을 사서는 퇴속해 버렸다.
인근 주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헌병의 도움을 받아 한강을 통해 용산에서 남산 북쪽의 동본원사 별원으로 옮겨 달았던 것이 1908년 일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제야의 종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타종소리는 1929년 1월 1일, 남산에 있던 이 종을 치면서 시작됐다. 조선총독부는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 초 유물'이라고 이를 보물로 지정했고, 해방 후 조계사로 옮겨져 국보 367호로 지정됐다가 1962년 국보에서 해제됐다. 이미 상원암에서 한강을 통해 옮겨질 때 일본인들이 계획적으로 조작해 바꿔치기한 일본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즘 새로운 반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바 중국 범종에서 한국 범종으로 변화하는 양식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범종이라는 설과 13세기 일본에서 만들어져 고려로 온 종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이 범종이 용문산 상원암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면 분분한 설들이 횡행하지 않았으련만. 그렇게 어려운 산길을 오르며 찾았던 구도의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욕망은 길 따라 순리대로 흐르는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잃을 때 일어나는 혼돈을 여실히 보여준다.
#평해로 옛길-평구역
서울에서 강릉으로 가는 옛 길 평해로는 경기도 3읍을 지나는데 한강을 따라 난 양주, 양평 어간의 그 길은 여전히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 길은 태조 건원릉부터 조선의 왕릉이었던 동구릉(東九陵), 혹은 홍유릉 가는 길처럼 화려한 길이 아니다. 기껏 왕릉이래야 속절없는 권력에 의해 빼앗긴 단종의 비가 묻힌 사릉(思陵) 혹은 광해군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길 옆으로 한강이 흐른다. 한강은 전근대 고속도로와 같은 역할을 했으니 물길이 닿지 않는, 혹은 다른 이유로 황톳길을 떠난 사람들의 수고를 알았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될 때 노정은 평해로의 평구역을 거치지 않았다. 동대문 밖 영리정에서 부인과 이별하고, 화양리에 있던 할아버지 세종이 최윤덕(崔潤德)에게 명하여 편액을 걸었던 화양정에서 전별연이 베풀어진 이후 단종은 광나루에서 뱃길로 이동해 여주 이포나루까지 가서 육로로 영월로 갔다.
광나루에서 뱃길로 미호를 지나고 두물머리를 거쳐 여주 이포나루까지 간 노정은 단종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였으리라. 우리가 가는 강원도로 가는 육로와 사뭇 다른 물길이었기 때문이다. 그 물길은 광주 분원에서 나는 도자기와 서울 사람들을 위한 땔나무, 혹은 강원도 영월·정선에서 오는 뗏목이 오가던 물길이지만, 여전히 경치 좋은 풍경을 찾아나서는 양반들의 유람선이 가능한 길이기도 했다.
1894년에서 1897년까지 3년간 4차례에 걸쳐 조선을 여행했던 영국 왕실지리학회 회원이었던 비숍(Bishop) 여사의 기행문에서 “한강의 수운은 날만 좋으면 25t 정도의 배라도 단양(丹陽)까지 오르내릴 수 있다. 한강은 충청도와 강원도 상류지역의 화물을 서울로 운반하고 있는데 내가 헤아려 보았더니 하루 평균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는 75척 이상이었다”고 적고 있을 만큼 뱃길이 활발하였다.
평해로에 위치한 경기 3읍은 서울을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이고, 뱃길로도 쉽게 이동할 수 있기에 서울로 대표되는 권력을 향한 또 다른 준비의 땅이기도 했다.
하여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숱한 인물들이 이 땅에서 나고 활동하였다. 조선 후기 사상계를 쥐락펴락했던 수석리 석실서원(石室書院)의 위치도 한강을 연하고 평해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양평에서 가평과 홍천 그리고 여주로 갈라지는 길목의 갈산에는 영호정(映湖亭)이 위치해 있다. 한강의 유장한 흐름을 굽어보는 그곳은 길이 갈라지는 길목의 교통의 편리함과 물길이 어우러지는 곳에 위치해 있다. 양평에서 홍천 가는 길에 택승정·봉황정·보산정 등의 이름난 정자들이 길가, 흑천(黑川)과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들 정자들은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아무런 계급적 편견없이 그 정자에서 쉬는 것을 허락했을까.
강호(江湖)에 병이 깁퍼 죽림(竹林)의 누엇더니,
관동(關東ر) 팔백리에 방면(方面)을 맛디시니,
"어와 성은(聖恩)이야 가디록 망극하다.
연추문(延秋門) 드리다라 경회남문(慶會南門) 바라보며,
하직(下直)고 물너나니 옥절(玉節)이 압패 셧다.
평구역(平邱驛) 말을 가라 흑수(黑水)로 도라드니,
섬강(蟾江)은 어듸메오 치악(雉岳)이 여긔로다.
송강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몇 해 전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경복궁에서 임금을 알현하고 양주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타고 흑수를 지나 원주로 가다가 들렀을 법하다. 송강이 읊었던 그 길을 1592년 임진왜란 이후, 1942년 일제는 한반도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중앙선이라는 이름으로 개통했다. 경부선 다음으로 남북을 관통하는 중요한 철도였다. 이로써 일제 식민지 정책상 필요한 철도 노선이 거의 완성되었다. 더군다나 한강 남쪽 여주의 물산과 뱃길을 수여선으로 바꾸더니, 한강 이북 양평의 육로를 중앙선으로 대체하는 순간이었다.
#몽양 여운형
그 중앙선으로 한강 나가는 길이 막힌 채 굴다리로 다니는 신원역 못미쳐 묘골(양평군 양서면 신원1리)에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 생가 터가 있다.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진 생가 터에 유허비가 세워진 것도 몇 해 전이고, 국가보훈처가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한 것도 해방 뒤 60년 만의 일이다.
2005년 국가보훈처가 3·1절을 맞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를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여운형은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는데, 광복 이후 좌우합작 과정에서 우익측 영수였던 김규식(金奎植) 박사에게는 건국훈장 1등급인 대한민국장이 서훈되었다. 그에게는 사회주의 활동을 이유로 그동안 독립유공자로 인정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 밖에. 그러나 유허비에서 만난 여운형의 7촌 조카인 여학구(75)씨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서운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쩌랴 아직도 이데올로기의 주술이 여전히 작동하는 것이 현실인 것을 말이다.
<한동민 수원시 문화관광과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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