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음 이덕형 선생의 묘에서 내려다 본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의 풍경. 경기도기념물 제89호이지만 산 아래 삼거리에 위치한 신도비가 이 곳이 명재상 이덕형 선생의 묘가 소재해 있음을 알려준다

   [창간 45주년 특별기획/길, 그곳으로 가다]

   12. 평해로 민족사 발자취 따라

   유사이래 길은 국가경영의 중심축인 도성(都城)으로 통하게 돼 있었다. 조선왕조의 경우 국토의 동맥인 도로가 전국으로 연결되었던 9개 노선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육로·수로와 통신수단인 봉수(烽燧)체계도 거의 9개 노선을 따라 설치됐음은 길, 그 곳이 바로 국가경영의 근간이었던 것이다. 조세와 각종 물산을 도성으로 수송하는 통로였고, 국방의 요새, 생활의 거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국민경제 균형의 저울추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역사 궤적의 현장으로 격동과 고난으로 점철되어야 했던 민족사의 발자국이 후세를 일깨우며 꿈틀대는 곳이기도 하다. 어디 그 뿐인가. 길의 노정(路程)에는 역참(驛站)과 주막(酒幕), 여각(旅閣)이 있어 나그네의 애환, 생활인의 여정을 달래주는 곳이기도 하였다. 특히 물줄기가 반려한 경승지 곳곳에는 정자와 누정(樓亭)이 시인, 묵객의 소회처(所懷處)가 되어 나라를 근심하는 고담준론(高談峻論)의 토론장이 되었는가 하면, 시정(詩情)을 주고 받는 시음장(詩吟場)이 되어 풍류의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이제 물줄기가 반려한 평해로의 어제에서 시공을 초월해 역사를 관류하는 여울물 소리를 들려주는 오늘의 그 곳으로 가본다.

▲물길과 벗하며 지나는 평해로의 풍광은 지나가는 나그네의 발길을 붙잡는다.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남한강변에 자리한 영호정은 조선시대 관(官)에서 이 곳을 지나는 나그네들에게 자연과 벗삼아 풍류를 즐기라고 지어준 정자다. 민(民)을 위하는 관의 민본행정 표본인 영호정 마루에 앉아 남한강을 내려보고 있자니 민심은 외면한 채관 주도의 일방통행식 행정·정치가 횡행하는 오늘날의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평해로의 군사요충 용진도
 
   용진도(龍津渡)는 지금의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두물머리)와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를 연결하던 나루터였다. 용진나루는 중앙선 양수리 철교와 육로다리가 설치돼 그 기능이 상실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근군 진도조(津渡條)에 “남쪽으로 광주와 40리 거리인데, 나루 위에는 여울이 있고, 가물면 걸어서 서울로 가는 큰 길로 통하여 요해지(要害地)였다. 남쪽에 상심리진(上心里津), 수청탄진(水靑灘津)이 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수청탄진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금의 양평군 양서면 반장리, 도곡리, 신원리, 국수리 일원과 광주군 남종면 수청리 퇴촌면 영동리 일원의 마을 주민과 물화(物貨)가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지금은 팔당댐 건설로 호수로 변해 동력선이 왕래하나 자가용시대로 접어들면서 다소 우회해 육로로 오고가는 실정이다.

남양주 조안면 진중리 마을 입구에 자리한 원주 변씨 선조인 변협(邊協)의 신도비.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때 해남현감으로 왜구를 격퇴한 주역이다.
    '태상시장록'(太常諡狀錄) 권 35 민종현찬(閔鍾顯撰)에 보면 임진왜란 당시 이천부사겸 경기방어사로 활약한 변응성(邊應星)장군이 “용진강에 나아가서 책(柵)을 세우고 성을 쌓으며 병기를 수선하고 양식을 높이 쌓으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그때 적이 원주에 진을 치고 줄곧 서울로 향할제 그 기세가 심히 날카로웠다. 공(公)이 밤낮을 헤이지 않고 군사들에게 충의로써 격려하여 적에게 대진하였다.

   적이 이를 무렵에 먼저 군사를 보내어 상류를 끊어 막고 반쯤 건널 때 물을 따돌렸다. 적이 크게 패해서 도망치었다. (중략) 이를 힘 입어 동로(東路)가 보존되었는데 공(公)의 공(功)이 가장 컸었다”고 한다. 마치 고구려가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중국의 수나라와 치열한 공방전을 벌일 때 을지문덕장군에 의한 청천강 살수대첩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장군이 쌓았다는 토성에는 현재 군부대가 들어섰으니 고금이 일치하는 절묘한 전략적 지세가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매년 음력 9월 그믐날에는 이 마을에서 공동치성으로 군웅제(軍雄祭)를 지내고 있으며 장군의 묘소도 이 마을에 있다. 진중리(鎭中里)에 용진(龍津)진터, 진말, 마뜰이란 속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변석균 진중2리 이장의 친절한 안내를 뒤로하고 같은 시기 임진왜란의 파란만장한 국운을 개척하는데 그 선두에 섰던 명재상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선생의 별서지(別墅址)를 찾는 평해로의 노정이다.

   #역사궤적, 사제곡(莎堤曲)·구미포(龜尾浦)전투·어수정(御水井)

   남양주 조안면 진중리의 이웃마을 송촌초등학교에서 운길산(雲吉山) 수종사(水鐘寺)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한 400여 년 은행나무 고목이 명재상 이덕형의 은거지(별서·別墅)였음을 일깨운다. 현재는 터만 남아있는 별서지에는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사제곡(莎堤曲) 기념비가 서 있다. 사제곡은 임진난국을 수습한 당대의 명재상 이덕형 선생이 광해군 시절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하다 정계를 은퇴, 이 곳 용진의 농막에서 은거하며 시국을 걱정할 때 평소 지음(知音)의 벗이었던 노계가 한음의 마음을 대신해 장가체의 가사로 대작한 작품이다. “용진강 지내 올라 '사제'안 돌아드니…운길산 돌길에 막대집고 쉬어 올나….” 지금의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한 용진나루터의 사제마을 옛 모습을 수채화의 노래로 역사를 캐고 있다.

▲현재 양평대교가 세워진 곳에 위치했던 양근나루터는 서울서 출발한 충청도, 강원도 물자수송선의 휴식처였다.
   해는 서산을 넘고 갈길은 바쁘다. 물길을 동반한 평해로의 정서를 어찌 외면할 것인가. 양평읍 양근리 갈산공원내 영호정, 이 곳은 평해로를 오고가는 나그네의 휴식처 태허루(太虛樓)가 있었던 곳이다. 수려한 남한강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여정의 피로를 막걸리로 달래었던 그 옛날의 생활풍정이 아쉬워진다. 한국인의 응집력 그 정서의 재현이 두려웠던가. 일제강점기 영호정은 그들의 신사(神社)를 이 곳에 세울 때 철거되었다. 1946년 복원, 6·25한국 전쟁때 소실, 1991년 조영기 양평초등학교장에 의한 복원으로 누정문화의 풍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평해로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국난극복의 현장인 구미포(龜尾浦)를 외면할 수 없다. 구미포는 광나루에서 남한강 물줄기를 거슬러 지금의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에 위치한 나루터다. '징비록'(懲毖錄)에 기록된 구미포 전투상황은 평해로의 물줄기가 국토의 요새였음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 곳에서 물길을 멀리해 육로로 단종(端宗)의 영월유배길, 역사의 한이 서린 어수정(御水井)을 찾아가 본다. 여정(旅情)은 시정(時情)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1456년(세조 2) 6월 단종의 영월유배길을 시위하고 난 후, 그 날 밤에 유배지인 청령포 굽이치는 바위에 앉아 서글픈 심회를 읊은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의 시(詩)다. 12세에 왕위에 오른 단종의 비극은 숙부 수양대군에 의한 골육상쟁, 사육신 사건으로 평해로를 회자하고 있다. 1456년 6월 22일 폭염이 기승을 더해가는 염천속에 단종의 영월유배길은 서울 동교(東郊)인 화양정(華陽亭)에서 환관 안로의 전송으로 시작된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는 길에 갈증을 풀었다는 여주군 향토유적 12호인 어수정.
   화양정은 1432년(세종 14)에 세종임금의 별장으로 건조된 누정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왕손이 24년후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도성을 마지막 작별하는 장소가 될 줄이야. 너무나 서글픈 왕도의 비정이 아닐 수 없다. 화양정은 지금의 한양대학교 앞 살곶이 다리를 건너 광나루와 직결되는 국도변, 지금의 화양동에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송비(宋妃)와 헤어지는 17세 다감한 정을 갈기 갈기 찢어 놓으며 광나루에서 곧장 남한강을 거슬러 여주군 대신면 상구리에 이르는 멀고도 험한 유배길이다. 상구리에서다. 때는 6월 복중 더위를 피해 마을 정자나무 밑에서 쉴 때 목이 무척 마르니 물 한 그릇을 떠오라고 해 시원하게 갈증을 푼 우물이 어수정(御水井)이다.

   여주군 향토유적 12호로 지정돼 고난과 시련으로 얼룩진 비정한 권력의 발자국을 전하고 있다. 골프장으로 변한 어수정의 오늘, 1980년대만 해도 우두산, 혜목산, 보검산이 감싸안은 안온한 농촌마을이었다. 2단의 축석으로 원형을 보존했고 주위를 잘 정돈해 어수정의 면모가 돋보이는 시대였다. 4계절 수량이 풍부한 샘물로 원근 주민의 식수와 약수, 그리고 농업용수로 이용했던 어수정의 어제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오늘이다.

   <강대욱 전 경기도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