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향토사학자 김영배 옹 인터뷰
“가까운 길 놓고 왜 그리 갔는지, 금강산은 이 길이 가장 빠르지….”
철원에서 한평생 살아온 김영배(78·향토사학자)옹. 금강산전철을 타고 학교를 다니고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녔다는 그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전철에 대한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는 “금강산 관광을 시작한다했을때 금강산철길을 연결해 이 길로 갔어야 했다”며 “이곳 주민들의 꿈은 경원선, 경의선 연결보다 금강산선 복원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1933년, 그는 철원심상소학교에 입학하면서 전철과 인연을 맺었다.
그는 “학교에서 금강산으로 수학여행을 가는길에 비좁은 객실에서 타지 학생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쌀 한가마니 값을 치르면서 금강산을 보려는 관광객들은 주로 일본인들이었다”고 말을 이었다.
이어 “화천구만리수력발전소가 가동하면서 철원지역과 서울·경기지역까지 전기를 공급하고 전철이 운행하기 시작했다”며 “석탄을 때면서 검은 연기를 내고 달리던 기차에서 전기를 이용해 전차가 움직인다는 것에 모두가 놀라워했다”고 말했다.
그는 1921년부터 1945년까지 운행한 전철은 사실 일본이 창도(현재 북한의 강원도 창도군)에서 생산되는 유화철을 본국으로 반출할 목적으로 설치한 운송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926년부터 창도에서 금강산까지 50㎞ 철로구간을 부설하면서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서울과 경기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와 금강산을 구경하려는 내·외국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아침 6시30분 첫차를 시작으로 2시간 간격으로 매일 8차례 운행하던 금강산전철의 화물칸에는 창도에서 생산한 유화철과 목재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고 한다.
특히 화물칸 7~8개량에 3~4개 객실칸이 이어져 있던 전철은 일본군인과 제철업체 직원들이 언제나 먼저 타 있었고 통학하는 학생들 말고도 철원과 서울 등지에 꽤나 규모가 컸던 제사(방직)공장과 제철공장이 있었던터라 일본 근로자들 뿐만 아니라 조선인 근로자들도 전철을 많이 이용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아침에 학교에 가기위해 역사에서 전철을 기다리고 있으면 철길 울리는 소리가 온 동네를 휘감았다”며 “전철을 타고 학교에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특권의식 같은 것이 있을 정도였다”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는 “당시 철원역과 동철원역 사이에 위치하고 있던 사요리역 주변에는 보통학교와 중등학교가 많아 대다수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금강산으로 떠났다”며 “금강산 가는길에 장터에 들러 아침밥을 먹고 갔다고 해서 아침리라는 마을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을 가기위해 전철을 이용했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53년. 금강산 철도는 전쟁의 포화속에 산산이 부서지고 뜯겨졌다. 이후 남북이 분단되면서 금강선 전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그 후에 그는 금강산 전철에 대한 추억을 잊지 못해 수십년동안 모은 각종 문헌과 사진을 토대로 철원군역사서를 발간, 금강산 철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는 바로 집 앞에 보이는 북녘땅 오성산을 가리키며 “금강산도 저 산만큼 가깝고 한걸음이면 달려갈 거리인데 너무 멀리 와버린것 같다”며 “일본인에 의해 처음 시작했지만 우리가 새로 이어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말을 맺었다.
[금강산철도는 달리고싶다·2] "전철타고 통학…특권의식있었지"
입력 2005-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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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0-2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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