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향토언론 개척자 이종윤 선생
1950~60년대 인천의 대표적 야당지인 '인천신보'와 '경기매일신문'의 편집국장과 부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언론인 상을 몸소 실천한 참 언론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향토 언론인 김응태(1921~1995) 선생은 타계하기 2년전 지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운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한마디로 말해 전형적인 선비풍에 꼿꼿한 분이었습니다. 언론사의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어깨에 힘을 준다거나 하는 일도 없었구요. 사리사욕이나 타협 따위의 단어들과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었어요.”
혈기왕성한 젊은 기자들도 평소 집안의 큰 어른처럼 모시던 운영 앞에 서면 어떤 호칭을 붙여야 할 지 망설일 정도로 몸둘 바를 몰라했다고 한다.
1899년 인천 화평동에서 고성(固成) 이씨 27대손으로 태어난 운영은 10살 무렵 박문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우면서 평생지기인 장면 박사와 인연을 맺는다.
세관장인 부친을 따라 인천에 와 있던 장면 박사와의 만남은 한학과 유교적 관습에만 젖어있던 운영에게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하는 계기가 됐고, 아울러 가치관 확립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장면 박사와의 교분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60년 가까이 이어진다.
공보장관 직은 완곡히 거절했지만 선생은 반민주특위에는 참가해 5·16 군사쿠데타로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주로 김포·강화 지역에서 활동을 했다.
선생이 언론계에 뛰어든 직접적인 계기는 일본 동경고등공예학교 인쇄과로 진학하면서다.
졸업후 오사카 대판매일신문사(大阪每日新聞社)에서 4년간 신문제작 실무를 익혀 귀국한 뒤 1927년부터 인현동에 '선영사(鮮英舍)'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쇄업에 뛰어들었다.
선영사는 1944년 일본의 통제경제정책에 따라 인쇄시설을 징발당하면서 간판을 내린다.
1945년 10월7일 대중일보가 창간되면서 공무국장(제작국장)으로 신문제작에 뛰어든 운영은 이듬해 5월 부평 병기창에 있던 인쇄기를 미군정청으로부터 불하받아 대중일보 인쇄인으로 취임했다.
6·25 전쟁으로 대중일보가 해산되고 인천신보로 재편되면서 부사장겸 편집인으로 취임한 운영은 1960년 인천신보가 경기매일신문으로 개칭되면서 부사장겸 7대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편집과 경영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밖에서나 집안에서나 말수가 적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선생이지만 큰 며느리인 강분희(75)씨의 기억을 더듬으면 그 누구보다 다정다감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이들도 그렇지만 남편(이벽)이나 시아버지나 성품이 비슷하셨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도 없고 무뚝뚝한 남편이었지만 제 생일날만 돌아오면 잊지 않고 선물을 꼭 챙겨주었죠. 결혼해서 3년밖에 모시지 못했지만 시아버지도 남편과 비슷하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선생은 자신보다 먼저 뇌졸중을 앓던 아내(민천순)가 세상을 뜬 지 17일만인 1967년 1월14일 아내의 뒤를 따랐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의감이 넘쳐흘렀던 선생의 기개는 2대를 넘어 3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선생과 비슷한 시기인 1947년 대중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뛰어든 장남 묵천(默泉) 이벽(李闢;1926~2000)은 서슬퍼렇던 박정희 정권 시절 '편집권 독립'을 위해 언론의 정도(正道)를 걸었다.
일부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이벽 언론상' 제정 움직임까지 일 정도로 이벽 선생은 부친인 운영 못지않게 향토언론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인천지역 원로 언론인들의 모임인 (사)인천언론인클럽에서는 60년에 걸쳐 향토언론 발전에 기여한 운영 집안의 공로를 인정, 가족을 대표해 이벽 선생에게 제2회 인천언론상 외길상(2003년)을 추서했다.
<김도현기자·kdh69@kyeongin.com> 김도현기자·kdh69@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