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오산분국 주최로 문자보급반이 설치되고 다시 무산아동을 위한 한글강습이 시작되었다. 오산에서 서울로 통학하며 민족의식이 뚜렷하였던 연희전문학교 1학년 이성모(李星模)와 실업전수학교 2학년 황경후(黃慶厚) 등이 교사로 문맹인 무산아동 50여 명을 민가에 모아 ‘한글강습‘을 하였던 것이다.
일회적으로 실시된 한글강습에 엄청한 지역민들의 호응으로 상설적인 야학으로 발전하였고, 이름도 노동야학(勞動夜學)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노농학원(勞農學院)이 되었던 것이다.
이는 오산리 소재 오산 노농학원장 겸 수원청년동맹 성호지부 집행위원장 변기재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 운동가들의 노력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일제의 처지에서 보면 노농학원은 무허가 학원이었고 예의주시하던 운동가들이 주도가 되어 성황리에 운영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이에 일제는 수원격문사건으로 함께 엮어 변기재를 구속함으로써 노농학원을 파괴하고자 하였다. 변기재는 1년 반 동안 감방생활을 해야 했다.
항일운동은 상하이 혹은 만저우 등 국외에서도 이루어졌지만 실제 일제의 조선지배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한 항일운동은 국내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1926~1943년까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진 사람은 7만 여명이다. 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근거로 활동하며 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이다.
■ 오산 문자보급 운동과 야학
입력 2006-06-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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