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인은 지금까지 정신병원을 나오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박준호도 어머니에게서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어쨌거나 박준호의 법적인 고모부뻘인 대사는 통 말이 없다. 박준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냥 목례만 까딱 했을 뿐이다. 손 한 번 잡아 준 적이 없다. 따지고 보면 다행한 일인지도 모른다.
박준호가 그처럼 여러 번 대사관저를 찾아가곤 했지만 단 한 번도 관저의 거실에서나, 그 넓은 도서실에서 맞닥뜨린 적이 없다.
박준호가 방문하는 그 시간, 대사는 줄지어 찾아드는 저명한 인사들을 면담하거나,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비서들과 현안 회의를 주재하거나 하는 분주한 일정을 보내는 터다. 어쩌면 대사의 젊은 부인인 리타 라일러도 오십보백보인 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눈코 뜰 새 없다. 한가하게 집 안에 틀어박혀 있을 때가 거의 없다. 박준호가 학교에 제출할 리포트용 자료를 찾는다는 핑계로 대사관저를 수없이 드나들며 기회를 보았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만난 적은 딱 두 번 있을 정도다. 물론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대사관저가 아니다. 헤이스팅스 집에서다. 그것도 그녀가 손수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실제로 영국 주재 미국 대사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다. 나토군 정보 책임을 맡고 있는 대니 라일러 장군에게는 더구나 그러하다. 그처럼 막강한 자리를 친누이동생의 남편이 차지했으니, 양아버지로서는 한꺼번에 두 개의 날개를 단 격이다.
그들 부부가 방문하기로 한 전날부터 집 안은 분주하기 짝이 없다. 커튼을 갈고, 유리창을 청소하고, 응접 세트를 옮기고….
안 그래도 깔끔하기로 소문난 양아버지의 극성은 집 안을 온통 뒤집어 놓는데 부족함이 없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박준호에게 정장을 입히며 말한다.
“너한테는 법적으로 고모님이고 고모부님이야. 오시면 뚱하게 입 내밀고 구석에 서 있지 말고 고분고분 인사도 잘하고 똑똑하게 대답도 잘하고…그래야 한다.”
박준호가 법적인 고모라는 말이 귀에 거슬려 금세 동조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왜 대꾸를 안 하니?”
박준호의 가슴을 퉁퉁 치며 채근해 마지않는다. 하긴 웬만해서 양아버지나, 양아버지 친구들이나, 그 밖의 양아버지 직장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 같은 곳에서도 어울리지 못하고 늘 외톨이가 되곤 하는 아들의 비사교적인 성격이 걱정일 수밖에 없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어머니가 또 강조한다.
“알았어요.”
마지못해 박준호가 대답한다. 그러나 리타 라일러가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그 같은 우려는 말 그대로 우려에 지나지 않는다. 리타 라일러 때문이다. 그녀는 첫인사를 받고, “그래, 얘긴 많이 들었다만 생각보다 훨씬 의젓하고 잘생겼구나” 라며 박준호의 어깨를 두들겨 준다. 한마디로 박준호의 닫힌 문을 활짝 열게 했다고나 할까.
그녀에게 박준호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듯이 박준호 또한 리타 라일러의 인상이 차갑거나, 거만하거나, 요란스럽지 않았던 것이다.
우선 얼굴 모습부터가 그러했다. 양아버지와 닮은꼴이면서도 광대뼈라든가, 눈썹이라든가, 코라든가 하는 부위가 많이 다르다. 뭐랄까. 같은 유형인데도, 아담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그야말로 부드럽고 맑은 모습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