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땅 구봉산과 문수봉 사이구간 두창리 고개 넘어 평지 농로를 지나면서 산지 아닌 평지 분수령을 확인하고 무릎을 쳤던 탐사반의 기억이 새롭다. 이제 석성산과 광교산 구간 망가리 버스정류장, 광교산과 오봉산 구간 지지대 고개 등 평맥(平脈)에 마주칠 때마다 너무나 익숙해져서, ‘그래 맞아, 이쪽으로 흘리면 서해바다요, 저쪽으로 흘리면 한강이라’며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잔잔한 기쁨의 절정은 시루봉이 한남정맥의 주봉이란 사실의 발견에서 온 듯싶다. 이웃해 있는 청계산, 관악산이 더 높은데도 주봉의 자리를 양보한 것은 이들의 동서면 어디를 흘러도 서해 아닌 한강으로 들어 분수령이 되지 못하는 ‘지맥’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맥은 산맥과 아울러 평맥을 짝으로 가지면서 지맥과 스스로를 구분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쯤 되니 ‘능선’과 대비되는 ‘마루금’, ‘날등’이란 말도 새삼스럽게 살아온다.
용인 땅을 지나는 한남정맥이 여러 봉우리에서 여러 하천을 자상하게 흘려내리는 고향, 어머니의 젖줄 같은 형국을 이루고 있다면, 수원에서는 광교산과 수원천이 간결하고 굵은 줄기를 이루어 아버지 같은 기상을 느끼게 한다.
나거나 일하는 곳이 이곳이어서 뒷동산 다니듯하는 이 산을 우리는 ‘봉·봉·봉’이라 부르곤 하는데, 물론 이는 형제봉, 비로봉, 시루봉을 이름이다. 시루 하나 가득 푸른 하늘 담고 있는 시루봉이 한남정맥의 주봉이듯 수원이 경기도의 수부도시인 것이 우연이 아닌 듯싶은데, 견강부회(牽强附會)하면 하늘, 주봉, 수부가 모두 공적으론 임금, 사적으로 아버지를 가리킴이 아니던가. 비로봉 또한 가부좌에 지권인(智拳印)한 ‘태양’ 비로자나불께서 노사나불, 석가모니불로 서봉사, 창성사를 끼고 ‘빛의 가르침’인 광교산 연화장(蓮華藏)에 앉아계신 형국이니, 이 또한 아버지의 상과 무연한 것 같지 않다.
실학자 반계의 선견지명과 개혁군주 정조의 안목이 만나 빚어낸 노쇠한 조선 봉건국가 재조(再造)의 상징 화성 신도시 건설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계기가 되었으니, 근대사의 여명기에도 그 인연은 또한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리라. 농업과 상업이 잘 짜여진 이 계획도시는 당시 상당한 정도로 발전하고 있던 상품화폐경제망인 국지적 시장권의 한 거점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해나갔다.
근대 서구 열강의 군사적, 경제적 공세 속에서 쇄국으로 포장된 국내 유치산업 보호 노력도 헛되이 이른바 개항을 맞게 되자, 자립적 국민경제 건설의 전망은 점차 엷어져갔고, 이 점에서 화성 신도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갑오농민전쟁은 그 절망적 단계에서 터져나온 전국적 저항운동이었는데, 동학 남접세력의 최고 지도자로서 전봉준과 함께 봉기했던 서인주(徐仁周·서장옥)가 다름 아닌 수원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당시 정세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농민군을 압살한 일본이 또 다시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하게 되는데, 수원 근방의 의병진들은 연합하여 수원을 점령하고, 영통리에 거주하던 한성부 관찰사 유기환의 집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되었던 우범선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자객에게 암살당하기 전 일본인 처에게서 얻은 우장춘은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유전자 합성을 통한 구황작물 개발로 백성들의 기아 해결에 일조하고 농촌진흥청 뒷동산에 고이 묻혀있다. 약탈적 성장에 눈 멀었던 부친의 죄가 아들의 창조적 균형 노력으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인가?
대한제국 시기 수원부민들은 조선 물자 수탈의 주동맥이었던 경부선 철로가 한남정맥의 혈로이자 정조의 한이 맺힌 지지대 고개의 터널로 길을 잡으려 하자 팔달문 밖에 모여 반대 시위를 벌임으로써 이를 저지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전국적으로 봉기한 정미의병은 수원에서도 지홍윤 등이 군수와 일진회 수령 정경수를 처단한 것을 비롯하여 한일합방 때까지 끈질기게 활동하였다.
3·1운동은 수원 곳곳에서 수원 기생조합까지 가세한 전체 민중에 의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그런 한편 양조, 직물, 제지, 정미, 연초, 운송, 가구 등 각 산업 분야의 조합, 주식회사 설립 활동이 꾸준히 이어졌고,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거쳐 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과정에서 증대하는 물자 수송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여선, 수인선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해방 공간에서 수원은 인민공화국 수원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박승극이 구금되면서 농민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인민위원회 대표회의가 열리기도 한 곳이다. 그런가 하면 이 시기 선경직물주식회사가 적산으로 미군정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가, 기계주임으로 자치운영위원장이 되었던 최종건에게 불하되었다. 선경은 이후 워커힐, 유공, 한국이동통신 등을 흡수하면서 현재 재계 3위의 SK로 성장하였다.
한국전쟁, 4·19혁명을 거쳐 5·16쿠데타로 등장한 군사 정권의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과정에서 수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