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마대가 있는 독산의 독산성은 주변 조망이 좋고 황구지천이 천연의 해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일찌기 수원고읍성의 대피용 산성으로 경영되었다.
한남정맥의 중간쯤에 수원의 진산인 광교산이 있는데, 한남정맥을 구성하고 있는 여러 산 가운데 가장 크고 높은 산이므로 주봉인 셈이다.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광교산을 몸으로 하고 남쪽으로 양쪽 팔을 둥그렇게 오므린 것처럼 산줄기가 이어진다. 이 산줄기의 안쪽은 대부분 지금의 수원 지역이다. 그런데 수원을 에워싼 양팔 중에서 오른쪽은 융·건릉이 있는 화산(花山)에다 정기를 모아 놓았고, 왼쪽은 세마대가 있는 독산(禿山)에다 독산성으로 똬리를 틀었다. 그리고 이 둥그런 산맥 안쪽에서 흘러내린 물길들은 황구지천을 이루어 화산과 독산 사이로 흘러 서해로 빠진다. 이 부분이 수원의 수구(水口)인 것이다.

화산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인 건릉과 정조의 부모가 묻혀있는 융릉을 품고 있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수원의 중심지여서 옛읍성이 '수원고읍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있고 옛수원의 관아 터가 융릉 앞에 있다. 정조 13년(1789) 이 옛수원의 중심에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 묘원이 옮겨오면서 지금의 수원 즉, 새수원이 열린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화성이 곧 예전의 수원이요, 지금의 수원은 사실 화성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새수원의 격을 높이면서 새로 붙인 이름이 화성유수부였으니까.

정조가 지방 관아를 옮기면서까지 부친의 묘원을 새로 조성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곳이 나라 안에서 가장 명당인 까닭에 선택하였을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발 108m밖에 되지 않는 융릉 앞엔 사시사철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또한 화산 동쪽에 있던 갈양사라는 절을 크게 중수하여 사도세자의 원찰로 삼고 절 이름을 용주사로 바꾼다. 정조 14년(1790)의 일이다. 그래서 효심의 근본 사찰이 되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 조성하였는데, 궁궐 건축 양식이 사찰에 녹아 든 예로도 용주사는 중요하다.

용주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황구지천을 건너면 독산(禿山)이다. 수원을 에워싼 왼쪽 팔의 끝에 해당하는 땅줄기이다. 이 산 꼭대기에는 독산성으로 불리는 산성이 있어 예부터 '수원고읍성'의 대피용 산성으로 경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성이니 방어에 효과적이고 황구지천을 건너야 접근할 수 있으니 자연의 해자를 두른 천연의 요새라 할 것이다.

여기에 올라보면 옛수원의 중심인 융·건릉 일대가 내려다 보이면서 황구지천이 가로막혀 있어, 수원 관아에 쳐들어왔던 적이 독산성으로 대피한 아군의 행보를 눈치채더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에 독산성 세마대 전설로 남아 산성의 우수함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서울을 되찾기 위해 독산성에 머무르던 권율 장군과 병사들은 물이 적어 고생하였고, 이를 안 일본군은 포위망을 점점 좁혀왔다. 위기를 느낀 권율 장군은 말 잔등이에다 쌀을 쏟아붓게 하여 먼 곳에서는 말을 물로 씻기는 것처럼 보이게 연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위기를 극복한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을 거쳐 서울을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래서 지금도 굳건히 서 있는 세마대(洗馬臺)의 전설로 남아 있는 것이다.

독산성이 옛수원을 지키는 대피용 산성이어서 농성(籠城)하기에 알맞은 곳이라면, 독산성 동쪽에 있는 죽미고개는 1950년 7월5일 유엔군의 일원으로 온, 미국의 스미스부대 장병들이 유엔군 최초로 공산군과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그래서 유엔군 초전기념비가 죽미고개 동·서쪽에 하나씩 서 있다.

그러나 이 길을 무심하게 씽씽 내달리는 자동차에서는 격전지라는 느낌도 없을 뿐더러 고갯길이라는 것조차도 실감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구부러진 길을 곧게 펴고 경사를 낮추어서 달리기 좋지만 30여년 전만 해도 버스 승객들이 때로는 내려서 밀어야만 오를 수 있었다니 화살 같다는 세월이 그대로 느껴진다.

죽미고개는 내삼미동과 외삼미동의 중간쯤에 자리하고 있다. 정조 때 대나뭇골과 오동나뭇골, 그리고 소나뭇골의 경치가 아름답다고 해서 삼미(三美)라 했다는 곳인데, 어떻게 된 것인지 죽미고개 언저리에서 대나무를 볼 수는 없다. 아마도 정조 때 사도세자의 묘원을 옮긴 다음 이 마을 사람들에게 대나무와 오동나무와 소나무 공출의 책임을 씌웠던 것은 아닐까?

외삼미동 예비군 교육장 옆 산줄기 끝에는 고인돌들이 철책에 둘러싸여 있다. 이곳이 예부터 사람이 살아가기에 좋은 땅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 있는 고인돌은 북방식과 남방식이 나란히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같은 민족의 남과 북이 각각 외세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싸움을 했던 곳에,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이 나란히 있다. 그러면 여기는 남과 북 화합의 장소인가?

남방식 고인돌이 평양에서도 발견되고 북방식 고인돌이 전북 고창에도 있으므로 이제는 남방식이다 북방식이다 하는 지역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고인돌의 생김새로 구분해야 할 것이라는 주장에 설득력이 있는 것도 이